현재 나는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가끔 나는 지금의 나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던 조인래 교수님을 생각한다. 조인래 교수님은 1953년에 태어나셨고 나의 아버지와 동갑이시다. 어디서 자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산에 있는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약간 쓰시고, 나와 마찬가지로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조인래 교수님에 대해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인래 교수님은 1971년 3월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셔서 1975년 2월에 학부를 졸업하셨다. 19세에 대학에 입학하셨으니, 생일이 좀 빠르신 것인지도 모른다.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신 것으로 안다. 1975년 3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셨고, 1977년 8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 석사과정에서는 철학을 전공하셨을 것이고,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연구하신 것으로 안다. 박사학위는 1981년에 시작하셨는데, 아마 그 전에 군 복무를 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군 복무를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인래 교수님께서는 1981년부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시작하셨다. 처음에 학위를 시작하셨던 곳은 존스 홉킨스 대학이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결과적으로 학위는 1989년 12월에 존스 홉킨스 대학의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한국 나이로 37세에 박사학위를 받으신 것이다. 1991년 9월부터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조교수로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셨으니, 39세에 교수가 되신 것이다. 서울대학교에는 41세인 1993년에 부임하셨다. 그 후 2018년 8월까지 서울대학교에 재직하셨으니, 27년 동안 교수 생활을 하신 후 퇴임하신 셈이다. 퇴임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서울대학교에서 2년 정도 강의하셨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서 석좌교수로서 2년 정도 강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조인래 교수님은 한국과학기술원에서는 아마도 소속이 인문사회학부였을 것이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인문대학 철학과 소속이었고, 이와 더불어 자연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겸임교수를 하셨다. 조인래 교수님께서 배출하신 박사로 이상원 박사님, 최성호 박사님, 장대익 박사님, 박석정 박사님, 천현득 박사님, 정동욱 박사님, 허원기 박사님이 계신다. 그중 천현득 박사님께서 조인래 교수님의 뒤를 이으셨다고 볼 수 있다. 천현득 박사님은 조인래 교수님과 그 이력이 사뭇 비슷하다.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물리학과 졸업 이후,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천현득 박사님은 박사학위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에 재직하시다가, 조인래 교수님의 후임으로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부임하셨다. 이후 소속을 철학과에서 과학학과로 옮기셨다.
천현득 교수님께서 조인래 교수님의 수제자였다면,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조인래 교수님의 바람직한 제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논리경험주의 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를 연구하는 것은 사실 조인래 교수님의 과학철학 연구 방향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인래 교수님께서는 나의 연구 방향을 늘 존중하고 긍정해 주셨다. 내가 석사 입학 후 휴학하고 육군 장교로 군대에 갔을 때, 박사 입학 후 휴학하고 취업을 한 후 계속 박사과정을 밟을 때도 나의 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는 내가 교수님의 뒤를 이어 대구경북과학기술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 강의를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시기도 했다.
그렇기에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감사하고 가장 본받고 싶은 과학철학자가 조인래 교수님이다. 나는 교수로서 생활하면서도 가끔 조인래 교수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나는 교수님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제자이긴 하지만, 교수님의 제자로서 교수님께 누가 끼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거듭 다짐한다. 나는 조인래 교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