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차분한 가을

강형구 2024. 10. 17. 08:38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자연 풍경을 보며 약간의 쓸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차분하고 애틋한 음악을 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계절이다. 오늘 문득 학교에 출근하면서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라 생각했다. 출근하는 길에 싱어송라이터 최유리, 백예린의 잔잔한 음악을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고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가족 이외에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어쩌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오고, 나는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이에 응한다. 큰딸의 친구가 주말에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하고, 둘째와 셋째의 어린이집 친구와 그 부모님이 주말에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없을 때 나는 특별히 외로움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그냥 멍하게 생각하거나, 글을 쓴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흥미로움을 느낀다. 나 자신을 관찰할 때도 있다. 때로 사람들은 말로 나를 즐겁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속이려 하거나 조종하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잠자코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그 문제에 관심이 많을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그 주제에 집착할까? 그냥 주변적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하면 될 텐데. 그것만 딱 하면 여유로운 시간이 생길 것이고, 그때 음악을 듣거나 생각하거나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텐데.

 

   돌이켜보면 내게는 늘 여유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학창 시절 부모님께서 딱히 내게 많은 걸 시키지 않으셨으므로, 학교가 끝나면 나는 집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학원에서도 영어와 수학만 매일 한 과목씩 70분 동안 배웠다. 국어나 과학 같은 다른 과목은 집에서 스스로 공부했다. 대학 시절에도 시간이 참 많았다. 그 시간에는 대개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캠퍼스 주변을 산책했다. 사람들은 대개 도서관 열람실이 아닌 자료실에서 책을 읽던 나를 찾곤 했다. 대학을 떠난 후에는 주로 카페를 이용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나는 무엇인가 거창한 방식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철학이 뭔가 대단하고 고상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세상에 철학이 있고, 철학을 가르치는 일이 세상에서 필요하기에,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나는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굳이 이 일의 가치를 물을 필요는 없고, 그저 최선을 다하려 한다. 종종 사람들은 내게 불손한 태도로 “왜 철학이 필요해?”라고 묻는데, 정작 그런 사람들에게 철학은 꼭 필요하다. 때로 사람들은 융합을 말하는데, 나는 억지스러운 융합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철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융합이 이루어진다. 철학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은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융합이 아닌 철학에 집중해야 한다.

 

   아내는 나의 가장 소중한 벗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내는 과학의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고, 최근에는 한국 현대 과학기술사와 관련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느라 바쁘다. 나는 아내와 과학과 철학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아내는 나의 과학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나는 아내의 과학기술사 연구를 가장 강력하게 응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운명 공동체다. 사실 나는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과학철학 연구자이지만, 아내만은 나를 세계적으로 대단한 과학철학 연구자라고 믿고 있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그런 허황된 환상을 좀 버리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래도 아내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면 내심 기분이 좋다.

 

   어쨌든, 나는 가을이 마음에 든다. 고독한 사람이면서 고독을 즐기는 나로서는 가을이 참 멋진 계절이다. 책과 음악과 생각과 가족이 있어 가을은 내게 더 멋진 계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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