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연구년에 관한 생각

강형구 2024. 10. 2. 22:22

   지난 학기는 대학교수로서의 첫 번째 학기라 비교적 바쁘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이번 학기는 그나마 좀 차분하게 지내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이번 학기에는 철학 과목을 2개 강의하고 있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다소 찾은 느낌이 든다. 어떤 수업이든 처음 할 때는 힘이 든다. 수업 자료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수업 자료를 만들면, 다음에 수업할 때는 기존의 수업 자료를 수정하면 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절약한 시간에 다른 책과 논문을 읽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읽고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업 교재의 생각이 아닌 나만의 생각이 형성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철학”이라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수업을 하는 첫 번째 학기에는 시중에 있는 책 한 권을 정해서 주 교재로 삼는다. 처음 수업할 때는 자연스럽게 주 교재의 내용과 관점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학기에 수업할 때는 수업 자료를 준비하는 시간을 절약함과 동시에 다른 책과 논문도 찾아보게 되어, 주 교재의 저자와는 다소 차별화되는 나만의 생각이 형성된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생각이 형성되고 축적되면, 그때는 독창적인 내용을 담은 나만의 책을 쓸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내 생각에는 비로소 이때 이른바 교수의 특권인 ‘연구년’을 써서 책을 집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구년’에 굳이 외국에 나갈 필요가 있을까? 물론 외국에 나가면 좋긴 할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연구에 더욱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외국에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외국에 있든 한국에 있든 상관없이, 연구년에는 평소에는 쓰지 못했던 책을 쓸 시간이 생기므로 아주 좋을 것 같다. 나는 대학생을 위한 표준적인 과학사와 과학철학 교재를 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좋은 논문(특히 영어 논문)을 쓰는 것도 좋지만, 좋은 대학 교재를 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의 철학, 인과와 확률 이론에 관한 입문서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쓰고 싶다.

 

   이번 학기에 “현대 철학” 수업과 “과학철학의 이해” 수업을 준비하는 것은 과학철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하나의 기쁨이다. 수업 자료를 준비하면서 수업 내용에 관한 내 생각을 정리하다가, 문득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나 자신의 철학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연구년이란 교수에게 바로 자신만의 책을 쓰라고 주는 시간일 것이다. 6-7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면 그동안 강의를 준비하면서 떠올렸던 나만의 생각들을 책이라는 형태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진다. 교수로서 재직하는 동안에 3-4권 정도의 책을 집필할 수 있다면 이는 충분히 성공한 교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재를 집필할 때 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출판한 교재들을 모범으로 삼으려 한다. 내용이 간결하고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고, 적절한 연습문제들이 있으며, 장별 내용을 요약하고, 별도의 워크북이 있어 내용을 편리하게 숙지할 수 있다. 책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읽고 학습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집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 자신이 방송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여러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내용은 꼭 담아낸 책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방송대 교재와 같이 내용이 알찬 과학사와 과학철학 교재를 만들고 싶다.

 

   이런 표준적인 교재를 한 번 제대로 만들게 되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수자가 이 교재를 참고해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쉽게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생을 가르칠 수 있는 교재는 현재로서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 우선 학부생을 위한 교재를 염두에 둘 것이다. 이후 만약 여건이 허락된다면 대학원 수준의 고급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재 집필을 고려해 보려 한다.

'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을 권함  (2) 2024.10.30
과학을 성찰하는 시간  (4) 2024.09.19
교수로서의 삶에 조금씩 적응함  (0) 2024.09.15
돌이킬 수 없는 현재의 연속  (4) 2024.09.08
인문학 연구자의 생존력  (6) 2024.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