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나는 최종적으로 우리나라의 국립대학교 교수라는 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지만, 내가 겪었던 인문학 전공자로서의 어려움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학 시절, 내 주변에 인문학을 전공하던 사람들은 취직 걱정을 참으로 많이 했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서울대학교의 인문학 전공자라서 더 걱정스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너무 고학력인 사람이 인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채용하는 관점에서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석사를 끝내고 박사 과정을 휴학한 후 취직을 준비할 때는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육군 장교로 군 복무를 한 데다가 석사까지 마쳤으니 다른 취업준비생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석사 과정에서 공부한 과학사 및 과학철학은 (이 분야로 직장을 잡지 않는 이상) 취업 시장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학부 학점이 썩 좋지 않아 이 또한 불리했다. 행정학, 경제학, 법학 등은 내가 학부 시절 단 한 번도 수강하지 않았던 과목들이었는데, 취업 준비를 위해서는 이런 과목들을 처음부터 새로 공부해야 했다. 참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모아둔 돈을 갖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서류 전형에서 많이 탈락했고, 면접 전형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이 탈락했다. 최종적으로 나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한국장학재단에 합격했는데, 한국장학재단 채용 과정에서는 경제학 및 경영학 관련 객관식 시험과 경제 논술 시험을 보았다. 이는 나의 원래 전공인 철학과 크게 관련이 없는 과목들이었다. 인문학, 특히 철학이 취업 시장에서 그다지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을 탓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오히려 사회적 현실에 순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인문학을 끝까지 고집한 게 아니라 내가 처한 사회적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나는 한국장학재단에서 행정 업무를 하면서도 과학철학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박사 과정에 복학하여 학점을 이수했다. 이것이 내 나름으로 계속 과학철학을 해 나간 방식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녀 학점을 이수하는 게 과연 쉬운 일이었겠는가? 생각을 해 보라. 아침에 일찍 출근한 뒤 빨리 일을 처리하고 나 자신의 연차를 사용하면서 오후 및 저녁에 개설하는 대학원 수업을 수강했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장을 다니던 2013년 가을부터 다시 박사 과정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2016년 8월에 겨우 학점 이수를 끝내고 수료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박사 과정 수료를 하고 나니 내 전공을 살려 국립대구과학관 채용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는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당시 국립대구과학관장과 전시연구본부장은 대구 경북 지역의 과학기술자료를 수집하고 주요 과학기술 인물을 조사 연구하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과학관에서는 그런 신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자를 뽑으려 했던 것이고, 나는 그런 의도가 담긴 채용 공고에 응했다. 국립대구과학관의 채용 과정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주제로 한 필기시험을 치렀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때는 한국장학재단과 대조적으로 나의 고유한 전공과 관련하여 시험을 치렀던 셈이다. 그렇게 국립대구과학관으로 이직한 후, 다시금 필사적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겨우 논문을 써냈다.
2023년 2월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꾸준히 논문을 쓰고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인근의 대학(경상국립대학교)에서 강의했다. 그렇다고 내가 국립대구과학관을 그만둔 것도 아니었다. 직장 생활과 함께 이 모든 일들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직장 생활과 연구 활동을 함께 하다가 결과적으로 국립목포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실력이나 능력은 잘 모르겠지만, 인문학 연구자인 나는 엄청난 생존력과 지독한 끈질김으로 결국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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