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나의 삶은 늘 주관이 뚜렷한 삶이었다. 부산과학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와 같은 철학적인 글을 읽으며 철학에 눈을 떴다. 수학자 하워드 이브스가 쓴 책인 [수학의 기초와 기본 개념]은 기본적으로 수리철학에 관한 책이었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러셀이 쓴 [철학의 문제들]을 읽고 요약하라고 하셨고, 이를 계기로 러셀의 책을 읽은 나는 철학에 관해 가졌던 관심을 심화시켰다. 그런데 한국의 제도에서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과(理科)가 아닌 문과(文科)로 옮겨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 되자 수학과 과학(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기본적인 학습이 끝났다. 그때가 되니 과학고등학교가 아닌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로 굳이 전학을 간다고 해도 딱히 더 배울 내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전학을 가지 않고 과학고등학교에서 스스로 나왔고, 이후 부산 시내의 도서관들을 전전하며 혼자 철학을 공부했다. 고등학교에서 나올 때 주위에 나를 만류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지만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갔다. 어차피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하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할 때, 아직 학과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철학을 공부할 것이라 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걱정과 저주가 빗발쳤다. 대개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면 걱정을 가장한 저주를 퍼붓곤 한다. 부모님마저도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것에 반대하셨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나는 학생 시절부터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꿋꿋하게 추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대학에서 늘 철학책을 읽었다. 육군 장교로 군 복무를 하면서도 늘 나는 내가 복무하던 홍천의 군립도서관에서 철학책을 읽었다. 대학원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나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철학을 해 왔다. 글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했다. 나는 내가 뛰어난 철학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오래전부터 철학을 좋아했고 철학을 계속해 왔으며 결국 철학으로 직장을 잡아 지금도 계속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뿐이다. 한국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삶이 그렇듯) 일종의 투쟁이다. 비단 한국뿐일까? 지구 위에 태어나서 철학을 하며 산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든 일종의 투쟁 아닌가?
내게 철학은 제2의 유전자다. 시인이 시인을 알아보고, 음악가가 음악가를 알아보듯, 철학자는 철학자를 알아보고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임을 감지한다. 나는 과학철학을 세부적으로 전공했지만, 예술철학이나 정치철학과 같은 다른 세부 전공을 선택한 철학자에게도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내게 철학을 하지 말라고 하던 사람과 달리 철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철학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만약 철학을 하고 싶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철학을 하라. 철학만큼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학문은 없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그러하다. 그러므로 철학이라는 학문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철학이 종말을 맞이한다면 다른 모든 학문 또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마시라.
철학적 재능을 걱정하지는 마라. 그런 특별한 재능은 필요 없기도 하고 실로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냥 철학을 하고 싶다는 마음, 계속 해 나가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결국 철학이라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철학을 하면 굶어 죽지 않는다. 철학을 하는 사람은 적지만 철학이 필요한 곳은 그에 비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학을 하고 싶다면 계속 끝까지 가 보라. 철학을 하기 위한 공식적인 자격증은 박사학위이며, 제대로 준비하여 이 자격을 득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서 철학을 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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