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논문 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강형구 2026. 5. 7. 14:08

   과학철학 연구자이자 대학교수로서 살아보면 내가 어떤 활동을 해서 우리 사회 속에서 가치를 인정받는지를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삶에 필요한 몇몇 교양 과목(과학사, 과학철학, 논리학, 인공지능 윤리학)을 가르치는 활동을 한다. 수업의 기본 교재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고 내면화할 수 있도록 강의 자료를 만들어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설명하며 학생들의 질문에 응답한다. 이번 학기(2026년 1학기)에 23학점(총 9개 과목)의 강의를 담당하는 중인 나로서는 수업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이 금방 지나갈 만큼 바쁘게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수업만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교수자이지만 연구자이기도 한 까닭에, 그 와중에 틈을 내어 논문(論文, paper)을 쓴다. 학부 강의는 내가 아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성격이 강하며, 좀 더 전문적인 수준의 내용을 이야기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연구하는 기능은 비교적 덜한 편이다. 그런데 논문은 좀 다르다. 논문에서는 나의 연구 분야에서 좀 더 깊은 내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대학원 수업을 하면 상황이 좀 달라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우리 학교에서 대학원 수업을 담당하지는 않고 있으며, 대학원에서도 사실상 학부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의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의 제대로 된 연구는 논문 쓰기와 이에 대한 다른 연구자의 비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논문 쓰기 활동을 언어적 활동의 측면에서 바라보려 하는 편이다. 우선 논문을 쓰려면 일반적인 교양서적을 읽어서는 곤란하고, 다른 연구자가 쓴 연구서 혹은 연구논문을 읽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글들은 비교적 그 수준이 높으며 이 분야에 익숙한 연구자가 아니면 내용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다른 연구자들이 쓴 글들을 제법 시간을 오래 들여 읽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리사가 제대로 요리하기 위해서 좋은 재료와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듯, 연구자가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들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런 다음 연구자가 글을 직접 써야 한다. 나의 경우 논문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분량이 나오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필요하다. 이때 일주일이란 참고문헌을 다 읽고 내 나름대로 소화해서 논문을 쓸 준비가 된 이후에 필요한 시간이다.

 

   이제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인간적인 고통이 수반된다. 오로지 연구자만이 특히 인문학(철학) 연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이 시작된다. 문장 하나하나를 이어 나가는 작업이 상당히 고통스럽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는 과정과도 같다. 철학 연구자는 언어 사용자이자 언어 생산자로서 특정한 유형의 글을 아주 천천히 생산한다. 이때 생산 속도가 느린 이유는 그것이 이미 있는 글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글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문학 논문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인문학 연구자는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이해하고 소화하고 독창적으로 재해석하고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덧붙여 새로운 글을 생산하며, 지금껏 그러한 과정이 인문학 연구자의 가장 가치 있는 사회적 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근 며칠 동안 나는 으레 겪어야만 하는 고통의 시간, 즉 논문 쓰기의 시간을 잘 버텨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논문 쓰기의 작업을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외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쓰인 논문은 아무리 봐도 ‘나의 논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다른 형태의 지적 작업에서는 적절히 인공지능을 이용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논문 쓰기만은 아직 내가 직접 해야만 하는, 포기할 수 없는 지성적 활동(노동)이라고 느낀다. 내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논문을 쓸 때 느끼는 고통(머리가 빠지고, 입안이 헐고, 조바심이 나고, 우울해지기까지 하는)과 그에 대응하는 즐거움(뭔가 새롭고 가치 있는 글을 써냈다는 뿌듯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철학 연구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이 무엇일지를 아직 나는 알지 못하겠다.

'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어 노동의 관점에서  (0) 2026.05.28
흔들림이 없는 사람  (0) 2026.04.05
교육과 연구에 집중함  (0) 2026.03.29
두려워하지 않고 연구함  (0) 2026.03.04
뒤늦게 찾은 비트겐슈타인  (0) 202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