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본 성향은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편이지만 이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안정을 추구하고 모험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나는 아예 처음부터 과도한 목표를 세우지를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나이 때 부산에 있는 명륜동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대입 입시학원에 다녔는데, 당시 한 달 학원비가 8만 8천 원이었다. 나는 그렇게 학원비가 저렴한 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 학원에 가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왔는데, 그냥 다른 뜻 없이 성실하게 공부하자는 원칙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다. 특정한 대학에 가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던 게 아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수학능력시험이 무척 어려워진 것 같은데, 만약 요즘 같은 시기에 나처럼 공부했다면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냥 나의 상황에 맞게 열심히 공부했을 뿐 다른 욕심은 없었기 때문이다. 별 고민 없이 시험을 보고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갔으리라 추측한다.
옷이든 신발이든 책이든 새로운 걸 잘 사지 않는다. 그냥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부분 만족한다. 사실 나는 국립대구과학관에 잘 다니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과학철학 교수 임용 공고가 나면 어디든 지원했다. 나는 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과학철학 연구자이지 과학관 연구원이 아니라고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인 국립목포대학교에 임용되었을 때도 마냥 기뻤다. 그런데 막상 생활해 보니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있는 대구, 학교가 있는 전라남도 무안군을 번갈아 오가며 이원화된 생활을 유지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다.
광주에 숙소를 잡아 2년 동안 지내면서 깨달은 게 있다. 주말부부를 하는 내게 새로운 도시에서의 문화생활은 사치에 가깝다. 무조건 숙소는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구해야 한다. 연구는 학교 연구실에서 하면 되고, 숙소에서는 잠만 잔다. 그렇게 생활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대구에 있을 때는 아이들을 돌보고 집도 관리해야 하므로 연구할 시간을 제대로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대구 집에서 정말 열심히 일을 한다. 집 정리, 청소기 돌리기, 빨래 돌리기, 빨래 널기, 설거지,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등등. 나 자신의 연구 때문에 가족들에게 소홀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다. 대구-무안 이동을 위한 운전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이동한 후에는 기력이 다 빠져서 몇 시간 정도 쉬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가정과 학교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한다. 둘 중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집에 있을 때는 마음껏 아이들을 사랑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학교에 있을 때는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교육과 연구에 집중하려 한다. 나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임용이 되었기 때문에(물론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지만)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남은 20년 남짓의 시간 동안 유의미한 성과를 얻으려면 실로 부지런히 연구해야 할 것이다. 과연 논문 100편, 번역 30권, 저술 5권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다소 공격적인 목표 설정인 것 같기는 하지만 이를 쉽게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 아이들이 앞으로 바르고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관심과 애정을 주면서도, 학교에서는 무난하게 교육하고 연구하며 잘 지내고 싶다. 나는 높은 지위를 바라지 않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게 주어지는 공식적인 일들을 외면하지 않고 면밀하게 잘 처리하고 싶을 뿐이다. 꼭 해야 하는 일들을 꼼꼼하고 성실하게 처리하는 것.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가치 있다고 검증된 일들을 천천히 해 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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