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과학의 일, 철학의 일

강형구 2025. 10. 22. 14:43

   약간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철학을 좋아하고 이를 업으로 삼으면서도 늘 철학의 어려움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철학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직업이 따로 있고 철학을 일종의 부업으로 하던 예전에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고 홀가분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나는 ‘21세기 한국에서 철학 하기’라는 내 앞에 놓여진 도전을 피하지 않으려 한다.

 

   방을 청소하거나 설거지하거나 빨래를 개는 실질적 활동, 혹은 공공기관에서 문서를 만들거나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활동은 약간 지루해질 수는 있어도 철학적 활동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다.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적 활동은 그게 쉽지가 않다. 철학적 활동에 관한 가능한 가시적 효과란, 철학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철학을 통해 세계와 사회와 인생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자기가 지금껏 몰랐던 중요한 어떤 측면을 깨닫는 것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학생들로부터 그런 인지적 반응을 유도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기계적인 절차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많이 준비해야 한다.

 

   철학의 주된 활동은 어떤 개념적 체계나 실천의 체계(틀) 내에서의 문제 풀이 작업이 아니다. 철학자는 타인이 쓴 철학 텍스트를 매개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그 속에서 다른 생각을 지어내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또 다른 철학 텍스트를 생산해 낸다. 그렇기에 철학자들은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지적 산출물을 논문의 형식으로 작성하며, 이때 논문 집필은 운동 경기라기보다는 예술가들의 작품 만들기에 가깝다. 철학적 글쓰기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조각을 빚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비슷하다. 철학자들은 대개 오랜 시간을 들이면서 자신이 쓴 글을 거듭 다듬는데, 이런 작업은 육체적 노동과 가깝다.

 

   과학철학자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과학을 들여다보고 가끔 직접 과학을 체험해 보기도 하지만 직업으로서 과학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과학자의 일이 과학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 아닌 과학을 하는 것인 것처럼, 과학철학자의 일은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다. 과학자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면서 과학을 하지만 과학철학자는 과학자와 과학에 대한 다양한 종류의 정보를 생각하면서 과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과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쓴다. 바로 그게 과학자와는 구분되는 과학철학자의 일이다. 과학철학자는 동시대의 과학적 실천(중 일부 측면)을 이해하고 소화하는 활동을 하며, 그 산물로 텍스트 혹은 발표 혹은 강연 등이 나온다.

 

   읽고 생각하고 말하는 쓰는 일련의 활동을 주된 생업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나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의 전통 아래에 서 있고, 그렇기에 직업적으로 나는 철학의 선배들을 더 친숙하게 기억하며 느낀다. 특히 대학 시절 나는 조인래, 백종현, 김기현, 김상환 교수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철학의 전통 아래 서 있는 나로서는 이런 선배님들이 나의 운명이라고도 생각한다. 네 분의 선배님들께서는 이제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하셨으니, 그야말로 철학자가 새로운 세대로 교체된 것이며 후학들이 선배들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다.

 

   철학자의 이름으로 철학자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게 되었으니 이는 나 개인에게 참으로 영광일 따름이다. 철학은 태어날 때부터 주변으로부터 오해받고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남아 지금까지 왔으니, 나 역시 과학의 일이 아니라 철학의 일을 하면서 주변 환경이 녹록하지 않아도 내게 물려진 이 전통을 잘 잇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