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흥미로움

강형구 2025. 10. 1. 10:09

   나의 전공은 과학철학이다. 내게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야는 매우 흥미롭다. 언어, 논리, 수학, 물리학은 오래전부터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의미를 따져 묻고 생각하는 활동이 즐거웠다. 그렇기에 언어, 논리, 수학, 물리학의 의미를 따져 묻고 그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늘 내게 즐거움을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수업 준비를 핑계 삼아 다시 언어, 논리, 수학, 물리학을 들여다본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공인된 난제를 풀이하기 위해서가 아닌, ‘이해’하기 위해서.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파인만(Feynman)이 든 비유가 있다. 과학자가 개척자라면 과학철학자는 개척된 땅을 사후적으로 관광하는 사람이다. 또는, 조류학이 새에게 별 쓸모가 없는 것처럼 과학철학은 과학자에게 별 쓸모가 없다. 나는 파인만의 비유가 대체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과학자의 게임은 과학철학자의 게임과 다르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게임에 속한 목표와 효과가 다르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과학자의 게임과 과학철학자의 게임은 원래는 하나였다가 일정 시기가 되어(19세기쯤) 두 개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내 생각에는 처음부터 과학자의 게임과 과학철학자의 게임이 서로 다른 것이었다. 그저 한 명의 사람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19세기 전까지 한 사람이 두 종류의 게임을 모두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퍽 유리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로 그러한 유리함이 서서히 없어졌다. 그 주된 이유는 과학자의 게임이 점점 더 대규모로 전문 직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게임이 전문화되면서 이와 연동하여 철학자의 게임 또한 수행하기 어려워졌지만, 그 변화가 정비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과학철학자는 과학철학이라는 게임(그 규칙을 조금씩 바꿔가며)을 해 나갔다. 하지만 정량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학자 중 과학철학자의 게임을 하는 사람의 비율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

 

   과학철학자의 게임을 하는 사람이 과학자의 게임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굳이 자신이 과학자의 게임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 비유를 들어 말해보자. 군인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그 경험을 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군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실제 군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하겠지만 굳이 자기 스스로 군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꼭 군인이 되지 않아도 군인에 관한 소설을 쓸 수 있다. 군인 생활을 하는 게임과 군인에 대한 소설을 쓰는 게임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내 마음을 퍽 자유롭게 한다. 왜냐하면 내가 과학철학자로서 하는 게임이 과학자의 게임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면 나의 행보가 과학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철학자의 게임이 과학자로부터 핵심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 게임은 과학철학자에게 또는 과학철학에 관심이 있는 일반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으며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평가가 더 중요하다. 더 나아가, 어쩌면 과학자가 과학철학자의 게임을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시선은 과학철학자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당연히 나는 과학철학자로서 과학을 존중하지만, 철저히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과학을 존중할 뿐이다. 과학철학이라는 게임을 더 잘하기 위해서이다.

 

   과학철학자의 게임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 게임은 과학자의 게임과 같은 혹은 더 이른 시기에 등장했다. 그러나 과학철학자의 게임은 처음부터 과학자의 게임과 달랐다. 과학자의 게임에 참견하는 게 과학철학자의 게임 중 핵심 부분이란 말은 차마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