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철학으로 살아야 철학인이 된다

강형구 2025. 11. 19. 13:20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철학을 배우거나 철학을 취미로 하는 것은 철학을 하면서 사는 것과 다르다.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대학원에서 철학을 배울 수 있다. 철학과 관련된 교과목이 있고 그 교과목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으로서 철학을 배우는 것은 철학을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교과목 가운데서 하나의 교과목인 철학을 배우는 것일 뿐이며, 그걸 철학을 하며 산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처음에 내게는 철학을 하며 살 용기가 없었다. 나에게 충분한 철학적 재능이 없다는 소심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러한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학생으로서 철학을 배운 이후 취직해서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나라는 사람에게는 철학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건 재능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하고 싶었기에 그냥 해야 했던 거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면서 좀 더 전문적인 철학 활동을 했다. 대학에 나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제대로 철학을 한 건 아니었다. 철학은 내게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다. 본업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철학을 부업으로 했던 걸까? 그런데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철학을 하지 않아도 본업만으로도 생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철학을 취미로 하니 나 스스로 내가 제대로 철학을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틈틈이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하더라도 결국 따지고 보면 나는 과학관의 연구원이었지 철학자가 아니었던 거다. 철학 활동을 해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 그 일로 먹고살아야 제대로 된 철학자 혹은 철학인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나는 안전하게 계속 ‘철학 애호가’로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나의 부실한 철학적 재능을 생각하면 그렇게 남아 있는 게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도 재능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위대한 철학자가 되느냐 그저 그런 철학자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철학을 하며 살고 싶었고 그렇게 해야 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철학을 하며 사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사실 나는 아직도 그게 무슨 의미일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잘 모르면서도 하고 싶으면 하면서 사는 게 삶이다. 이제 나는 정말 철학을 하면서 살고 있다. 철학이 아닌 다른 정체성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나는 더 이상 행정원도 연구원도 아니다. 나는 철학자, 철학인이다. 때로 내게 주어진 ‘철학자’라는 이름이 퍽 무겁긴 하다. 그래도 이건 내가 선택한 결과다. 이제 나도 철학이라는 학문의 제물이 되어 철학의 역사 속에 들어온 거다.

 

   오늘 내가 철학인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확인시켜 준 일이 있었다. 오전에 목포 시내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2시간 동안 ‘과학과 철학의 유별난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왔다. 예전에 썼던 강의 자료를 재활용한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시작해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 자료를 새로 만들었다. 이번에 강의 자료를 만들면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썼다. 이렇게 나는 철학자로서 우리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앞에서 다른 게 아닌 철학을 이야기한다. 철학이란 무엇을 하는, 어떤 활동일까? 철학은 과학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 철학은 과연 인간에게, 특히 과학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직 뼛속까지 철학인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 같다. 철학을 취미가 아닌 생업으로 삼은 후 2년 정도가 흘렀다. 이제 나는 내 삶을 철학에 바친다. No way out. 철학의 화신이었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물론 나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슈퍼 스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사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상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철학을 하는 건 그 사람이 철학을 해야 하도록 생겨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태어났으면 살아야 하는 것처럼, 나는 철학을 해야 하므로 철학을 해 나갈 뿐이다. 일종의 동어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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