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간 애늙은이처럼 고등학생일 때부터 방송대학 TV 채널을 좋아했다. 그 채널에서 방영되는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나는 인문학 강의를 좋아했지만, 자연과학 혹은 공학과 관련된 강의도 좋아했다. 과학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의 불만은 너무 과학 교과목에만 치중해서 공부한다는 것이었고, 대학의 인문대학에서 생활하면서 나의 불만은 인문대 학생들이 너무 이공계열 과목을 이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과학의 실제를 잘 알고 깊이 이해하는 철학자. 그러면서도 일반인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철학자. 이러한 철학자의 모습이 내가 오래전부터 꿈꾸었던 철학자의 모습이다. 비록 아직 내가 그런 철학자가 되지는 못한 상황이지만 말이다.
그와 더불어 나에게는 ‘평범함의 추구’가 아주 오래전부터의 과제였다. 비범함의 추구가 아닌 평범함의 추구. 그런데 굳이 평범함을 추구할 필요까지 있을까? 그런데 나에게는 평범함의 추구가 쉽지 않은 과제로서 다가왔다.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일. 인문대학 출신인 나에게는 취업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굳게 결심하고 계획을 세워 실천하려 애썼다. 32세에는 결혼한다(결국 33세에 했지만). 최소 둘 이상 아이를 낳아 기른다. 무난하고 성실하게 살아서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혼주의와 낮은 출산율을 생각하면 왜 내가 그러한 ‘평범한 삶’을 상당히 도전적인 과제로 느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철학과가 아닌 교양학부에 소속된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이는 나의 기본적인 성향 또는 내 삶의 이력과도 상당히 부합하는 것 같다. 나는 철학의 한 분야를 아주 깊게 들어가 탐구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두루 둘러보며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에 관해서도 계속 살펴보고 싶고, 그와 동시에 문학, 역사, 예술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이 간다. 나는 내가 석학(碩學)이라기보다는 교양인(敎養人)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하게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한 관심을 유지하면서 계속 공부해 나가는 사람.
이와 같은 관점은 내 삶의 이력과도 관련된다. 나는 취직 준비를 할 때 철학 공부를 한 게 아니라 법학,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을 공부했다. 취직을 한 이후 공공기관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내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실무적인 행정 능력이었다. 과학관에서는 어떤가? 당연히 철학 그 자체가 업무에 활용되지는 않았다. 나는 과학의 역사, 과학의 사상을 전시 콘텐츠(전시 내용, 전시품)에 실용적으로 녹여냈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실제로 쓸 수 있느냐’였다. 내가 순수한 학문 분야에서 일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학문의 깊이 그 자체를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관에서 겪은 나의 경험은 그러한 순수한 학문 추구가 아니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 그래야만 관람객이 모이고 사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의 관점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나의 목표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도 충분히 소화하고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학생들과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삶에 유용한 철학. 그러한 쓰임새 있는 철학을 지금껏 나 스스로가 추구해 오기도 했다. 철학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철학을 활용하는 것. 당연히 이런 식이 아니라 철학 그 자체를 위한 심도 있는 철학 탐구를 추구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그러한 철학 탐구를 할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나에게는 나라는 사람의 그릇에 맞게 맡겨진 역할이 있을 뿐. 그 역할을 계속 재미있게 해 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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