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나는 스스로 자신이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를 전문적인 수학자 혹은 자연과학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나는 상식적인 관점을 가지고 수학 혹은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과학 애호가라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재미를 느끼며, 순수하게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에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고 잘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부산 동해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우리 학교의 수학경시대회 대표로 선발되어 부산시 대회를 준비했다. 그때 학교에서는 경시대회 대표 학생에게 일종의 특권을 주었는데, 그것은 매일 일정 시간 동안 학교 정규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 내의 특정한 장소에서 경시대회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것이었다. 나는 수학 공부를 하는 시간이 마음에 들었고, 그때 나와 함께 물리 경시대회를 준비하던 친구를 보면서 물리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때부터 수학과 물리에 관심을 가졌고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었다.
부산과학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나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러셀(Russell)과 데카르트(Descartes)의 책을 통해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스스로가 수학 및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철학자들이었고, 철학자이긴 했지만 동시에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저자는 아인슈타인(Einstein), 라이헨바흐(Reichenbach)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이후 지금껏 계속 나는 흔히 말하는 순수한 인문학적 학문인 철학에만 몰두한 적이 없었다. 늘 나는 수학, 물리학을 포함하는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살펴봤다.
그 시절부터 나는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문제를 풀고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 중 특정한 사람들이 갖는 일종의 ‘성향’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중학교 시절 이래로 계속 글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해 왔고, 단지 그 이유로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생각에 내가 특별히 머리가 좋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사실 나는 공부 이외 대다수의 일에서 다소 미숙한 편이다. 실제로 어머니께서는 나를 ‘공부만 할 줄 아는 바보’라고 평가하신 적이 몇 번 있다.
막상 과학철학 연구자가 되어 보니, 연구자라는 사람은 작가와 비슷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 연구자는 거창한 태도로 근엄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까? 물론 그런 태도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러한 태도와 방법이 퍽이나 부담스럽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수학과 과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며, 그런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글을 읽고자 했고, 나 자신 역시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과학 작가로서의 과학철학자다. 사실 과학자가 과학 작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자이면서도 과학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몇몇 있지만, 내가 볼 때 이분들은 과학은 잘하는지는 몰라도 과학 작가로서는 내공이 퍽 부족하다.
중고등학생이던 시절, 매 순간이 평범하고 지루했고 그만큼 행복했다. 전혀 부담을 갖지 않고 그저 공부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학에 들어가니 그전까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유와 함께 강한 심리적 압박이 몰려왔다. 뭘 하든 잘 해야 한다는 압박. 우리 사회에서 잘 자리 잡아야 한다는 압박.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압박이 잘 맞지 않는다. 나는 그냥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던 것처럼 큰 심적 부담 없이 편안하게 읽고 생각하고 쓰고 싶을 뿐이다. 이해가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글이 잘 써지면 글을 잘 쓰는 대로, 글이 안 써지면 안 써지는 대로. 그렇게 편안하고 즐겁고 평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