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순간과 자신에 집중하며 살기

강형구 2025. 5. 25. 08:03

   나는 내 삶을 떠날 수 없다. 내 삶은 나의 운명이다. 만약 변화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지금의 나로부터 겨우 조금씩 가능한 것이지 내가 지금과 다른 아주 새로운 나로 변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누구이고 지금 내 삶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직시하라. 늘 인간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직면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 다른 요행이나 편법을 바라서는 안 된다.

 

   제도는 견고하지만, 그 제도에 매몰되고 그것에 대한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제도는 언제든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국립목포대학교 교수이고, 대학교라는 기관과 대학교수라는 지위는 비교적 견고한 편이다. 그러나 대학교와 그 대학교의 교수라는 형식적 제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제도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실력과 능력이다. 정말 제대로 알고 있고,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어야 지금 유지되고 있는 제도가 크게 바뀌어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쓰임을 받고 인정을 받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과학에 대한 이차적인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일종의 편견이다.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 이차적인 텍스트, 이차적인 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이차적인 특성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는 텍스트가 아닌 다른 텍스트가 꾸며내고 지어낸 것일 뿐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고유한 텍스트이며, 그 고유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쓰는 일은 고유한 작업이다. 과학을 이해하고 그것을 사회 공동체 속 광범위한 부류의 인간 개체들과 소통할 수 있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은 과학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비슷하게,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하려는 결단은 과학을 하려는 결단과 동등한 수준의 결단이다.

 

   기관과 제도보다는 텍스트가 먼저다. 기관과 제도는 텍스트를 유지, 재생산, 확장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덧붙여진 외형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관련된 온갖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현상들 중심에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있다. 철학 역시 비슷하다. 철학이라는 제도와 문화를 유지하게 하는 핵심적인 몇몇 텍스트가 있고, 그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인간과 사회와 제도가 회전한다. 회전은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그 규모와 강도를 변경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 중심에는 텍스트가 있다. 텍스트는 견고하고 이동하며 전염된다.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이 세계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늘 언어와 텍스트를 요구한다.

 

   물론 나는 기관과 제도에 너무나 감사하며 나의 감사함은 일종의 존경심에 가깝다. 지금껏 내가 소속되어 왔던 기관과 제도는 우리 사회가 만들었고 공적인(public)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종종 그 기관과 제도의 일시적이고 가상적인 특성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름보다는 실력이 먼저다. 실력이 있기 때문에 명성이 높아지는 것은 맞지만, 명성에는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덧붙여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실력을 다시 생각하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순간과 자신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말하고 새로운 텍스트를 쓰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런 일들을 온전히 충실하게 하루하루 해내고 있는가?

 

   내가 지금까지 이 사회 속을 겨우 헤쳐나올 수 있었던 기반은 순간에 충실한 태도였다. 부족한 나를 미워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그저 순간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 계속, 부지런히, 쉬지 말고, 읽고, 생각하고, 쓰라. 그게 너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고민하거나 회의하지 말고 그냥 하라. 그렇게 죽을 때까지 끝까지 해 보라. 그렇게 너에게 주어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스스로 선택한 삶에 최대한 충실하라. 그런 충실함이야말로 끝까지 너를 기만하거나 배신하지 않고 결국 너를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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