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나폴레옹의 키는 결코 작지 않았다(높이, 길이, 깊이)
- 저격수의 망원 조준기와 항공기의 폭격 조준기에 들어가는 십자선(cross hair)에 사람의 실제 머리카락이 쓰인 것이다. (17쪽)
- 인치는 엄지손가락 크기로 정의되었다. 엄지손가락 크기는 사람마다 달라서 단위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노르망디의 윌리엄 1세(William the Conqueror, 1028? ~ 1087)는 1066년 잉글랜드 정복 후에 1인치를 보리알 세 톨을 줄지어 놓은 길이로 정했다. 이 결정은 에드워드 2세(1284~1327)가 1324년에 반포한 법령으로 명문화되었다. 1324년 법령에 따르면 1인치는 ‘마르고 둥근 보리알 세 톨을 세로로 잇대어 놓은’ 길이다. (20쪽)
- 스웨덴어로 인치는 툼(tum, 엄지손가락)이다. (23쪽)
- 인도에서 쓰는 인치는 잉글랜드 인치의 1.32배(3.35cm)에 달했다. 인도 인치는 왜 이렇게 길었을까? 가설은 두 가지다. 인도 사람들의 엄지가 유난히 컸거나, 인도 사람들은 인치를 보리알이 아닌 쌀알로 정의했거나. 두 번째 가설이 더 유력하다. (24쪽)
- 중국판 인치라 할 수 있는 촌(寸)은 엄지손가락 너비가 아니라 엄지손가락 첫마디의 길이를 기준으로 했고, 이는 잉글랜드 인치의 1.312배(3.3cm)에 해당했다. 이렇듯 인치의 길이는 나라마다 제각각이었다. (24쪽)
- 지역별 업종별로 수많은 단위가 어지럽게 쓰이며 만드는 온갖 부조리가 만연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프랑스의 혁명 세력은 국경을 넘어도 변하지 않는 통일된 도량형 기준을 세우고자 1799년 미터법을 제정했다. (25쪽)
- 피트의 저주에 걸린 배. 바사 호 건조에 사용된 공구 중 일부가 배에 남아 있었는데 이를 조사한 결과 좌현을 맡은 스웨덴 작업자들은 그들 나라에서 1863년 이전에 쓰던 인치와 피트를 사용하고, 우현에 배정된 네덜란드 작업자들은 11스웨덴 인치가 될까 말까 한 암스테르담 피트를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26쪽)
- 알다시피 피트(feet)는 발뒤꿈치에서 발가락 끝까지를 기준으로 한 단위다. 1피트는 30.48cm에 해당하고, 1피트는 12인치이며, 1인치는 2.54cm에 해당한다고 국제적으로 합의된 것은 1959년 7월이었다. 그 전까지는 혼돈이 지배했다... 역사적으로 피트의 길이는 주로 당대의 통치자나 군주의 발 길이를 기반으로 했다. (31쪽)
- 1300년 경 에드워드 1세(1239~1307)가 야드와 퍼치 위원회(Composition of Yards and Perches)를 소집해 보리알 세 톨의 길이를 1인치로, 서른여섯 톨의 길이를 피트로 재정립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34쪽)
- 하지만 1300년 경 에드워드 1세가 야드와 퍼치 위원회를 소집해 헨리 1세의 야드를 뒤엎고 보리알 세 톨을 연이어 놓은 길이를 1인치로, 12인치를 1피트로, 3피트를 1야드로, 5.5야드를 1퍼치로, 40×4퍼치를 1에이커로 정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39쪽)
② 막대기로 지구의 크기를 재다(거리)
- 프랑스 제1공화정이 1799년에 10진법 미터법을 공표하자 다른 나라들도 앞 다투어 이를 도입했다. (48쪽)
- 영국의 대표적 거리 단위 마일(mile)은 고대 로마의 브리튼 점령 때 처음 영국에 들어왔다. 앞서 말했듯 마일은 라틴어 밀레(mille, 千)에서 유래했다. 1밀레는 로마 군대가 1,000파수스(passus) 행군한 거리였다. (1파수스는 한쪽 다리를 뒤에서 앞으로 크게 휘둘러 딛는 간격이다.) 로마군은 미지의 지역을 행군할 때 장교 한 명이 파수스를 세는 임무를 맡아서 밀레 간격으로 막대기 표식을 땅에 박았고, 그날 행군의 끝 지점에는 출발 지점부터 총 밀레 수를 새긴 표석을 놓았다. 마일스톤(milestone, 이정표)은 이렇게 탄생했다. (59쪽)
- 엘리자베스 1세가 1593년 ‘도량형 법령(Weights and Measures Act)’을 제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모든 척도는 보리알 세 톨이 1인치라는 고래(古來)의 개념에 기초한다는 전제하에 12인치를 1피트로, 3피트를 1야드로 정했다. 이로써 1마일은 1,609m(5,280피트)가 되었다. (61쪽)
- 1668년 미터 개념을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이 있었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철학자 존 윌킨스(John Wilkins, 1614~1672)였다. 윌킨스는 반주기(흔들리는 진자추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가 1초인 진자막대의 길이를 표준 단위로 삼자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의 주장을 지지했다. (67쪽)
- 1889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미터 원기가 사실은 200μm(밀리미터의 5분의 1) 모자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68쪽)
③ 마리 앙투아네트와 C컵(넓이, 부피)
- 하이드는 가족을 뜻하는 앵글로색슨어에서 왔고, 따라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땅 크기를 의미했다. (79쪽)
- 파인트의 최초 정의는 액체 32모금이었다. 16모금 컵(cup), 32모금 파인트(pint), 256모금 갤런(Gallon). (83쪽)
- 1901년 제3차 국제 도량형 총회... 총회는 10cm 정육면체 개념을 버리고, 정확히 1기압과 3.98℃에서 측정한 최대 밀도 상태의 순수한 증류수 1kg이 차지하는 부피를 1리터로 다시 정의했다... 이후 1964년 제12차 국제 도량형 총회에서 리터의 정의가 또다시 바뀌어서 1790년대의 10cm 정육면체 개념으로 회귀했다. (88쪽)
④ 영혼에도 무게가 있을까(무게, 배수량, 밀도)
- 그램. 유럽에 그램(gram)이란 용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기원후 400년경이었다. 그 무렵에 발행된 작가 미상의 가요 ‘도량형 노래’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프랑스에서는 중세 때 처음 쓰였다. 고대 그리스의 오볼로스(obolos)에 기반한 무게를 표기하는 용도였다. 오볼로스는 구리나 청동으로 만든 얇은 침인데 길이는 짧은 못만 했다. 이것이 통화 단위이자 무게 단위로 쓰였다. (112쪽)
- 시민혁명에 따른 사회 격변이 한창이던 1795년 4월 7일, 프랑스는 그램을 진공 상태에서 측정한 최대 밀도의 순수한 물 1cm3의 무게로 재정의했다. 물은 얼음이었다가 막 녹은 시점에서 밀도가 가장 높은데, 1795년 당시에는 이 때의 물 온도를 4℃로 생각했다. 현재는 물의 밀도가 가장 높아지는 온도를 더욱 정밀하게 3.984℃로 잡는다. (112쪽)
- 킬로그램은 그램에 1,000을 곱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탄생했다. 문제는 킬로그램을 질량의 표준 단위로 정하고 킬로그램 원기를 제작할 때였다. 킬로그램 원기는 백금 90%와 이리듐 10%의 합금으로 만들었다. 애초 1795년에 그램을 정의할 때 있었던 온도 상의 미세한 오차 때문에 결과적으로 25ppm 모자라는 킬로그램 원기가 나왔다. 쉽게 설명하면 1kg에서 마른 쌀알 한 톨 정도의 무게가 모자랐다. (112쪽)
- 옛날에 유럽에서 곡식 낱알을 무게 측정의 기본 단위로 쓴 것처럼, 동방에서도 극도로 가벼우면서도 무게가 일정한 캐롭(carob)이라는 콩과 식물의 씨앗을 미량 표시용 단위로 썼다. 아라비아에서는 이것을 키라트(qirat)로 불렀다. (122쪽)
⑤ 2월이 이틀을 뺏긴 사건(날짜와 달력)
- 달력은 종교의식 거행 시점과 임차료 지불 일자를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에서 발생하고 진화했다. (132쪽)
- 바빌로니아인의 업적은 위대했다. 일단 1년을 12달로 나눠서 훗날의 12개월짜리 태양력 개발에 기여했다. 일주일이 일곱 날이 된 것도, 우리가 지금의 시분 구성을 가지게 된 것도 바빌로니아의 공이다. (133쪽)
⑥ GPS의 시간은 점점 빨라진다(시간과 시계)
⑦ 귀뚜라미가 온도를 알려주다(온도)
⑧ 다가오는 푸른 별, 멀어지는 붉은 별(소리와 빛)
⑨ 유쾌하고 위험한 판도라의 단위들(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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