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13: 원자의 존재

강형구 2016. 5. 31. 06:52

 

13. 원자의 존재

 

   우리가 살펴보았던 원자 이론이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사람들로부터 잘 이해되지 못했고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원자 이론이 연구자들 상당수로부터 지지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자 이론의 적대자들은 늘 있어왔으며, 오늘날에도 원리상 원자론적 개념에 반대하고 여전히 원자 이론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이런 사람들 중 상당수가 환상적으로 사변적인 경향을 가진 철학자들이며, 이들은 자연과학의 추론 방식에 의해 얻은 결과들을 근본적인 불신을 가지고 바라본다. 이들은 우리가 거시적인 차원에서 감각을 통해 관측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시적인 차원의 것으로부터 물질이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자 이론에 대한 반대자 중에서 위대하고 심오한 지성들도 있었다. 물리학의 영역에서는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가, 화학의 영역에서는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old)와 마르셀린 베르틀로(Marcellin Berthelot)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원자론에 대한 이와 같은 저명한 연구자들의 반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반대가 갖는 이론적인 측면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반대는 다음과 같은 개념에 기초한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론적 구성물에 최소한의 공간만을 허용해야 하며, 실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 사실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사변으로의 경향이 주도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은 중세 시대의 자연과학의 불행이었으며, 자연에 대한 모든 현대적인 탐구들은 중세 시대와 같은 사변적인 발전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실 원리적으로 원자론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원자 이론은 연금술적인 사변처럼 여겨진다. 베르틀로는 언젠가 원자 이론을 하나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자 가설은 사실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입증되는 진술들만 허용된다는 자연과학의 근본 원리를 위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원자 가설을 지지하는 모든 증거들은 그 본성상 간접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관측을 통해서 우리는 특정한 거시적인 현상들과 그 규칙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거시적 현상과 규칙성은 미시 세계에서의 원자를 가정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거시적 현상을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것에만 의존하는 그와 같은 증명이, 설명을 위해 도입된 미시적인 대상들의 실재적인 존재에 대한 증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적인 사물들이 우리에 대해 파악 가능한 실재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원자들 역시 우리에 대해 그러한 실재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앞서 우리가 언급했던 저명한 반대자들은 정확히 이와 같은 원자들의 실재성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들은 자연과학의 현상들을 기술함에 있어 원자 이론이 극도로 단순하고 성과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원자의 개념을 “작업가설”의 수준으로만 제한하고자 했고, 이러한 유용함으로부터 원자의 실재적인 특성을 주장하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아 했다. 자연과학에서 사변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우리가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원자의 경우에 제시된  위와 같은 논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의 내용을 특정한 방식으로 넘어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연구의 실질적인 과정에서 새롭고 근본이 되는 현상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그와 같은 확장이 필요하다. 원자 이론의 사례에서와 같이 여러 경험적 사실들과 함께 이와 같은 확장이 진행되는 경우, 아주 다양한 계산들이 원자들의 크기와 수에 대한 동일한 결과 값들을 산출하는 경우, 원자 이론의 틀 안에서 예측된 법칙들이 높은 수준으로 입증될 경우, 우리는 해당 이론을 과학적 진리라고 특성화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의 원천 이외의 또 다른 제3의 원천은 없다. 사고는 과학적 탐구를 잘 수행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실재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 도구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물질이 공간을 연속적으로 채우고 있다면, 물질에 대한 불연속적인 입자 구조로부터 시작되는 이론이 그와 같이 정량적으로 만족스러운 결과 값을 도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매우 어렵다. 우리의 간접적인 추론을 미시 규모의 구조에 관한 주장들에 적용하는 것을 손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주장들은 결국에는 우리가 감각 경험을 갖는 중간 차원의 세계와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와 같은 추론에 의해서 얻어진 개념들이 실재에 대해 갖는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면, 이는 특정한 작은 크기에 다다랐을 경우에는 물리적 실재가 끝난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가 나무 조각을 볼 때, 톱밥의 입자들은 그 입자들이 비롯된 나무의 큰 조각만큼이나 실재한다. 톱밥을 더 잘게 부수면 우리는 오직 현미경의 도움으로만 식별되는 더 작은 입자들을 얻게 된다. 만약 이러한 분할의 과정을 계속 이어가서 현미경으로도 식별되지 않는 입자들이 생성된다고 하여도, 이 입자들이 관측 가능한 더 큰 입자들보다 덜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입자들이 작기 때문에 더 복잡한 방법을 동원해서 입자들의 실재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원자 가설을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지 과학적 사고의 기술적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자연과학의 탐구에 사용되는 사고의 양상을 인지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추론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 없이는 가능할 수 없다. 만약 개념들이 경험의 틀 안에 들어맞으면, 이는 거시적인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이 그러한 것처럼 실재적인 의의를 갖는다. 차이가 있다면 오직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둘 사이의 구분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먼지 입자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도 추론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광학 법칙들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우리는 우리가 현미경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좀 자세히 살펴보면, 탁자나 집이나 다른 사람들과 같은 거시적인 사물들 역시도 추론된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물들을 진술하는 데 있어 가끔씩 오류를 범한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다. 우리는 반사된 영상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공기 중의 빛의 굴절에 의해 생긴 신기루에 속기도 한다. 만약 한 대상이 복잡한 이론적 고려들에 의해서만 추론될 수 있다면, 이러한 종류의 증거는 그것의 실재적 특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물의 실재적 특성은 오직 주어진 증거가 타당한지의 여부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만약 원자 이론이 과학에서 그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원자 이론은 참이다. 그리고 원자 이론이 참이면 원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이는 과학이 원자 가설의 증거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최근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우리는 원자의 존재에 대한 일련의 증명들을 확보했으며, 이러한 증명들은 압도적으로 믿을 만하기에 원자 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의심마저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이러한 증명들은 원자에 대한 직접적인 입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원자에 대한 간접적인 입증들과는 구별된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직접적인 증명들에서도 하나의 단일 원자를 가시적인 것으로, 즉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생명체의 세포와 같이 다른 작은 사물들처럼 만들 수는 없다. 원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이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광학의 영역에서 기술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빛의 파장에 비해서 원자는 너무도 작기 때문에 빛에 의해서 비춰질 수가 없다. 즉, 원자는 다른 사물들처럼 빛을 반사시킬 수 없다. 우리는 원자를 비추기 위해서 극도로 짧은 파동의 빛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파동은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짧기 때문에 “감마선 현미경”을 사용해서 원자를 촬영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주 다른 본성을 지닌 근본적인 난점들이 발생하는데, 이는 17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원자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원자에 대한 증명들은 막대한 수의 원자들에 대한 관측들, 즉 평균적인 현상에 의존하는 반면, 오늘날에는 하나의 단일 원자 또는 소수의 원자들에 귀속시킬 수 있는 효과들을 관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효과들은 미시 규모의 물질이 가진 불연속성 및 입자 구조를 보여준다. 여기서도 우리는 특정한 추론을 행하기는 한다. 그러나 관측된 것은 명백히 물질의 입자적인 본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현상들 중 우리가 처음으로 주목해 볼 것은,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이 발견하여 브라운 분자 운동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현미경으로 아주 작은 먼지 입자들을 관측하면, 입자들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입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 분자들이 입자들과 부딪치기 때문에(물 위에 떠 있는 먼지 입자들의 경우 주위의 액체 입자들과 부딪치기 때문에) 발생한다. 커다란 물체들에게서는 그와 같은 현상을 관측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측면들에서부터 충격이 오기 때문에, 충격들이 평균적으로는 서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충돌하는 분자들의 수가 아주 적어서 이러한 상쇄가 일어나지 않고 압도적인 충격이 하나의 방향에서 가해졌다가 다시 다른 방향에서 가해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분자들만큼 작지는 않은 가장 작은 먼지 입자들을 생각해보자. 이 입자들은 매우 작기 때문에, 주변에서 움직이는 분자들에 의해 생기는 효과들이 더 이상 거시적인 현상에서처럼 연속성이나 균질성을 갖지 않고, 서로 분리된 분자들이 가하는 충격에서 볼 수 있는 불연속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현미경을 통해서 소용돌이치는 먼지 입자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모습을 결코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비록 그가 원자들 그 자체를 보지는 않았을지라도, 원자들이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있는 작은 공간에 창문이 달려 있고, 그 창문으로부터 비춰진 원자들의 그림자놀이를 관측했다는 분명한 느낌을 갖게 된다.

 

   분명 이 현상의 운명은 다른 현상들의 운명과 닮았다. 이 현상을 발견한 사람은 이것이 가진 내적 함축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버트 브라운은 그의 앞에 원자의 운동학 이론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증명이 펼쳐지고 있는지를 결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식물을 기름지게 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중이었고, 꽃가루들이 난세포(ovum)와 결합하는 장소를 발견하기 위해서 가장 작은 꽃가루 낟알들의 경로를 추적하고 있었다. 로버트 브라운이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827년 8월부터 몇 달 동안 수행한 실험들에 대해 그 자신이 어떻게 보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속에 가라앉은 이 입자들의 형태를 탐구하면서 나는, 이들 중 많은 수가 아주 명백하게 운동하고 있음을 관측했다. 입자들은 상대적인 위치의 변화로 드러나는 유체에서의 위치 변화 운동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입자 그 자체의 형태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브라운은 자신이 살아 있는 입자들의 독립적인 운동을 관측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열적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지 않은 입자들을 가지고 실험을 시도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따라서 그는  알콜을 이용해 꽃가루 낟알들을 죽인 다음 다시 실험을 했는데, 입자들의 운동성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식물표본상자에 몇 백 년 동안 있었던 오래된 꽃가루 낟알들을 가지고 다시 실험을 해 보았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따라서 그는 이 운동이 살아 있는 합성물(composite)의 운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질의 궁극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분자들 즉 “유기적 물체의 중첩된 구성성분 또는 기본 분자들”의 운동이라고 보았으며, 그는 다른 유기 물질에서도 이러한 분자들을 찾고자 했다. 브라운은 나무를 으깨고 문질러 입자들을 얻었는데 이 입자들 역시 같은 운동을 보여주었고, 따라서 그는 이 입자들을 생명의 분자들이라고 여겼다. 또한 브라운은 “모든 물체 위에 침전해 있는 적은 양의 먼지 또는 검댕(soot)은, 특히 런던의 경우, 전적으로 이러한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광물들을 가루로 만들어서 실험해보았는데, 현미경으로 관찰할 때마다 입자들의 운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설명 방식을 고수했고, 이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생명 과정에 대한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를 수행했던 브라운은 이 현상에 대한 설명에 전혀 기여할 수가 없었다. 이 현상의 진정한 본성이 인지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863년에 크리스티안 비너(Christian Wiener)는 처음으로 이 현상이 생명 과정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혔고, 분자 운동을 이용하여 이 현상을 설명했다. 람세이(Ramsay)는 이 현상이 열적 운동과 갖는 연관을 좀 더 분명하게 인지했다. 그러나 정확한 설명은 1905년에 이르러야 두 명의 탐구자들인 스몰루코프스키(Smoluchowski)와 아인슈타인(Einstein) 의해 서로 독립적으로 제시되었다. 둘 다 먼지 입자들의 경로를 수치적으로 연구하였고 열의 운동학 이론에 의한 실험적 시험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현미경을 통해 입자들의 경로가 측정될 수 있었고, 따라서 계산 결과와 측정 결과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검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뒤따르는 실험 결과 두 사람의 설명은 완벽하게 입증되었다.

 

   브라운 운동과 관련하여 전기 전하의 원자적 특성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것 역시도 가능했다. 왜냐하면 브라운 운동을 하는 입자들이 때때로 전기적으로 대전되는 것이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전기적으로 대전된 금속판을 입자들 가까이에 가져갈 때 입자들은 전기적 인력(혹은 척력)에 의해 금속판 쪽으로 끌릴 것이다(혹은 반발할 것이다). 입자들의 속도를 관측해서 입자들의 전기 전하가 가진 세기를 계산할 수가 있었다. 입자의 전하와 인력의 효과가 클수록 입자의 속도도 빨라질 것이었다. 실험 결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측정된 입자들의 전기 전하는 하나, 둘 혹은 정수배의 단위 전하를 가지고 있었다. 발견된 단위 전하의 수에 의하면 입자는 하나, 둘 혹은 정수배의 전자들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자의 전하 값에 대응하는 전하보다 더 작은 전하는 관측되지 않았다. 또한 항상 전자의 전하 값의 정수배에 해당하는 전하만이 관측되었고, 1과 1/2 또는 2와 1/2과 같은 전하는 관측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실험에서도 우리는 전기의 단일 원자가 보여주는 효과들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비록 전자가 분리된 상태에서 발견되지 않고 먼지 입자들에 속박된 채로 발견되기는 하였지만, 입자들의 전기 전하가 갖는 모든 수가 정수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전하의 원자적 특성 즉 전기 원자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비엔나의 물리학자 에렌하프트(Ehrenhaft)에 의해서 여러 실험들이 진행되었다. 이 실험들은 전자보다 더 작은 전기 입자들의 존재를 증명해서, 결과적으로는 전자가 추가로 분할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실험들은 매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입자들의 통제 불가능한 불순물 효과 및 흡수된 기체층의 효과가 실험들에서 특정한 역할을 했음이 의심되며, 이는 실험에서 계산된 결과를 반증하는(falsifying)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그리고 믿을만한 입자들을 사용해 이루어진 모든 실험들이 이전까지의 결과 즉 전자의 전하보다 더 작은 전하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에, 에렌하프트의 개념들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단일한 원자들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또 다른 도구는 섬광측정기(scintilloscope)다. 섬광측정기는 방사성 물질로부터 방출되어 민감한 물질로 칠해진 막에 부딪치는 원자들을 이용한다(14장과 비교해볼 것). 원자가 부딪침에 따라 막은 짧은 빛 섬광을 내보내고, 렌즈를 통해서 이 섬광을 볼 수 있다. 섬광측정기로 보는 광경은 극도로 놀랍다. 우리는 막이 서로 다른 지점들에서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러한 반짝임은 기관총에서 발사된 단일 원자들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명확한 인상을 갖게 된다.

 

   미국인 찰스 T. R. 윌슨은 원자와 전기 광선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들을 수행했는데, 이 실험들은 매우 아름다운 결과들을 낳았다. 윌슨은 자신의 실험에서 과포화된 물 증기의 속성들을 사용했다. 공간이 그와 같은 과포화된 증기로 가득할 경우, 증기는 작은 안개 방울들을 형성해서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 실험가들은 “과포화된” 상태, 즉 증기가 응축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는 상태를 조성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외부적인 충격이 가해져야만 응축 과정이 일어난다. 이러한 충격을 생성하기 위해서 윌슨은 방사성 물질에서 방출된 원자 또는 전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입자가 날아가면서 그 경로에 증기 방울들을 형성시키며, 등불로 이러한 방울들을 비추면 빛나는 궤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궤적들은 직선이며, 방출된 원자들 또는 전자들이 갖는 방사선적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가끔씩은 궤적이 휘어지기도 하는데, 이때는 입자가 공기 원자와 충돌해서 휘어졌기 때문이다. 그림 16은 이와 같은 윌슨의 광선을 보여준다. 이 사진에서 광선을 방출하는 방사성 결정 자체는 촬영이 되지 않았지만, 방사성 결정은 그림의 좌측 하단 끝에서 조금 더 떨어져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 사진은 대략 실제적인 크기의 광선들을 보여주고 있다.

 

   원자에 대한 이상과 같은 납득할만한 증명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원자의 반대자들은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 물질의 원자적인 특성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가장 확실한 사실들에 속한다. 원자는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며, 과학은 우리가 별들의 존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의 확실성을 갖고 원자들의 존재를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원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보였다. 마치 우리가 밤하늘에 있는 빛나는 작은 점들을 보며 이의 원인이 되는 별들에 대해서 추론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