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철학자로서 살아가기

강형구 2024. 9. 4. 11:15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삼국지를 읽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문열씨가 편역한 10권짜리 삼국지를 거듭 읽었고, 일본 코에이(Koei)사에서 출시된 삼국지 게임도 거의 빼놓지 않고 즐겼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쉽긴 하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았을 테고, 그걸 재밌는 소설로 썼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왜 한국인인 내가 중국의 역사에 열광했고, 왜 그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 만든 일본의 게임을 즐겼을까? 지금이라도 우리의 역사를 단서로 해서 멋진 소설과 게임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이제 우리나라의 작가들도 충분히 뛰어난 역사 소설을 쓸 수 있고 우리나라의 게임 개발자들도 세계적으로 뒤지지 않는 수준 높은 게임을 만들 수 있지 않나?

 

   어쨌든, 나는 삼국지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제갈량(諸葛亮)으로부터 가장 큰 인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글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선비와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평안한 세상이었다면 아마 그는 초야에 묻혀 계속 학문 연구에 몰두했겠지만, 어지러운 세상이었고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왔기에 어쩔 수 없이 유비를 따라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 후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따르는 주군을 배신하지 않고 충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는데, 나로서는 그 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였다. 제갈량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나 말고도 많이 있었으니 나의 이런 평가가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게 가장 친숙한 철학자의 상은 이처럼 동양적이다. 나는 철학자라고 하면 선비 혹은 승려를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나 중세 교부 철학자들 등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동양 특히 한국 사람이라서 그럴 것이다. 한국에도 당연히 유구한 철학의 전통이 있다. 비록 내가 서양의 철학, 특히 과학철학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존재로서 내가 그리는 철학자의 그림은 동양적이다. 조선의 이상적인 선비는 특별한 일이 없는 평소에는 학문을 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필요하면 논밭을 갈았고, 나라에 의롭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내게 철학자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회 개혁가라기보다는 평소에 조용히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는 자애롭고 온화한 사람이다.

 

   또한 철학자로서 중요한 덕목은 근검(勤儉)과 성실(誠實)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의식주(衣食住)인데, 대개 철학자는 옷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먹는 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호화로운 집을 바라지 않는다. 또한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밤의 적당한 시간이 되면 잠이 든다. 규칙적이고 알찬 생활이지만, 무리해서 많은 일을 벌이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에 만족한다.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고 욕심을 부리면 무리해서 일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러면 몸과 마음에 부담이 생겨 삶이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했을 때 얻는 이득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일 자체를 즐길 때 일을 정성을 담아 하게 된다.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근검과 성실이다.

 

   이처럼 나는 철학자를 생각할 때 삶의 방식을 먼저 생각하며, 그 사람의 사상이 무엇이고 그 사람의 논증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먼저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상과 논증도 철학자에게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주제와 관련하여 성실하게 연구하고 논문 쓰고 책을 번역하고 책을 쓰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내게 남을 이기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 싶은 욕망은 거의 없다. 그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나의 부족한 능력을 긍정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성실하게 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상이 내가 철학자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그림이며, 놀라운 것은 나 또한 한 명의 철학자라는 것이다.

'일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활하는 철학자  (10) 2024.09.22
삶을 단순화하기  (6) 2024.09.11
국립목포대학교 교수라는 자부심  (6) 2024.08.28
한반도 지식인의 전통 속으로  (2) 2024.08.25
나의 정치적인 관점  (0) 202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