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한반도 지식인의 전통 속으로

강형구 2024. 8. 25. 07:38

   최근 나는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세계상이나 세상에 대한 개념들이 마치 내가 입고 있는 옷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세계상과 개념은 ‘비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이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한반도에 수입된 서양의 문물이다. 그 이전까지 한반도에서는 한반도 고유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는 예전까지 진행된 역사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와 나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오래전 가졌던 서양적 수학과 과학에 관한 선망과 환상 역시 그다지 근거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 또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82년에 태어난 나는 1980년대 대한민국 경제 호황의 수혜자다. 당시 의류도매업을 하셨던 아버지의 사업이 비교적 잘 되었고, 나는 물질적 부족함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기에 내가 특별한 지성적 자극을 나의 가정환경으로부터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자주 교류하던 분들은 대개 이웃에 사는 다른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그저 나는 동네에 있는 비교적 수준이 높은 영어와 수학 학원에 다닐 수 있었고,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내가 사고 싶었던 책들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낭비하는 식으로 책들을 많이 샀던 것은 아니다.)

 

   ‘과학고등학교’라는 기관은 한국적인 특징을 갖는 교육기관이며 나는 이 기관 고유의 의의와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과학고등학교에서는 재학생이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면 이를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그러한 길을 택했다. 내가 과학고등학교를 스스로 관두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인슈타인 역시 김나지움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이었지만, 아인슈타인의 사례는 내게 좋은 핑곗거리였던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당시 과학고등학교를 그만둔 학생들의 수가 적은 것 역시 아니었다. (내 기억에 40명은 넘었던 것 같다. 입학생 수가 180명이었으니, 어림잡아도 20%는 넘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과와 문과 모두에 관심이 있었고, 옛날식으로 따지면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선비와 같은 사람에 가까웠다. 나는 두뇌 속도가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을 좋아했고, 글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을 즐겼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노력과 행운이 겹쳐서였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그 사회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있고,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운영하는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나는 지극히 평범한 한 명의 학생이었을 뿐이다.

 

   나는 군 복무를 충실히 했다. 일반 병사로 복무할 수도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하여 근무하는 장교의 길을 택했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는, 정식 공무원 조직은 아니나 국가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에서 일하며 먹고 살았다. 유학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능력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좋든 싫든 이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한다. 대다수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이 반도 위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적지 않은 불합리함을 겪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참고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조금씩 나의 정체성을 오롯이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서양의 역사와 철학을 나의 것이라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학철학 역시도 한국 사상의 전통 아래에서 흡수하고 동화시켜야 할 것이다. 설혹 내가 한국 사상 전공자 수준으로 깊이 연구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 자신의 정체성이 한반도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궁극적인 나의 모범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지식인이지 외국 사람(아인슈타인, 라이헨바흐, 칸트 등)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외국의 사상을 한국의 것으로 동화시켜야 하지, 그 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