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이 철학인지 모른 채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이후 내가 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소 놀라곤 한다. 이들은 내가 수학 또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대부분의 주제, 개념, 이야기 등이 실제로 과학 혹은 기술에 연계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의 이와 같은 반응이 타당하며, 이는 나라는 사람의 중요한 면모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가끔 내가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명료한 개념 체계와 단순하고 분명한 문제 풀이를 좋아한다. 추상적이기만 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맹목적으로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고 문제를 잘 푸는 것에만 집중하는 관행은 몹시 싫어했다. 나는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가 흥미로웠고, 다양한 자연 현상을 나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그렇게 자연이 돌아가는 것인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과학적 지식이 어떤 의미에서 강력하며 어떤 의미에서 한계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그런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우리나라의 과학 교육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예전에 비해 정말 많이 나아진 것 같다.
그렇게 과학과 공학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나는 주로 수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책을 두루 읽으며 때로는 공학에 관한 책도 읽는다. 내가 철학 중에서도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학철학에서는 상대성 이론의 발전 과정 및 그 의의와 같은 구체적인 과학 이론 혹은 기술에 대해 논하는 경우 많기 때문이다. 철학을 위한 철학이 과연 존재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하며, 철학은 인간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에 대해 생각하고 답하며 나름의 체계적인 해석을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내 생각에 철학적 사유는 늘 과학과 공학이라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지식에 의해 보완되고 보충되어야 한다. 현재 인간이 갖고 있는 과학적 지식 중 어떤 지점들에서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되는지를 알려 하면, 당연히 지금의 과학적 지식이 갖는 여러 측면을 직접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들여다봐야 어디에 철학적 문제가 있는지, 이러한 철학적 문제가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면 무릇 철학적 사유와 과학 기술 지식에 관한 공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과학과 공학을 공부하면서 상당한 재미를 느낀다.
인간은 매우 영리한 존재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제시되면, 인간은 각종 기발한 발상과 수단을 동원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노력과 발상이 개별 과학 지식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직 생각만으로 가득한 철학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인간이 지구 위에서 이렇게 거대하고 정교한 집단을 이루며 세계에 대한 고도의 설명 및 예측 체계를 발전시킨 것에는 당연히 그에 적절한 이유가 있다. 사회적 생존을 위해,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개체들이 치열하게 서로 경쟁하고 협업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바로 인류의 문명이다.
나는 가끔 의식적으로 과학철학이라는 나의 전공 분야 서적들에서 벗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과학과 공학 혹은 수학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나름 감탄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이렇게 나의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에 관한 이야기를 비전공자의 관점에서 겸손한 태도로 듣고 읽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이 내가 과학철학자로서 활동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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