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부모님의 아들

강형구 2014. 9. 10. 22:04

 

부모님의 아들

 

   주기적으로 거울을 보면 나는 내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지 않고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지각들과 내 생각의 흐름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세상은 내게 경이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생각이 아득해지기 전에 나는 다시 거울 속의 내 얼굴을 확인하고, 내 삶의 의미를 확인한다. 언어와 의미가 세계 속에 부유하던 내 삶을 안정시킨다.

 

   이번 추석 명절에는 아내인 은혜와 함께 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내려가서 차례를 지내고, 성주의 효 요양병원으로 찾아가 할머니를 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올해 아흔 세 살이시다. 할아버지는 1921년 생이셨고, 나의 아버지는 1953년에 태어나셨다. 나는 1982년에 태어났다. 대략 30년 주기로 세대가 이어지고 있다. 부계 중심으로 가족의 계보를 따지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전통 아래에서, 나는 해방 후 2~3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나는 진주 강씨 박사공파의 28대 손이다. 강씨는 고구려 시대부터 있어 온 성씨라고 한다. 나의 할머니는 성주 이씨이고, 나의 어머니는 밀양 황씨이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매우 점잖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가끔씩 불같은 기질을 드러내던 분이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강씨 집안의 독자이셨기 때문에 집안의 잡다한 일에는 관여를 하지 않으셨고, 점잖은 양반의 분위기를 내셨다. 할머니는 매우 부지런하고 고집이 세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집안의 차남이셨다. 큰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으셨지만, 나는 나의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를 더 닮으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는 경상북도 성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시고, 대구에 있는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신 후 은행 입사 시험에 실패하셨다고 한다. 정확하게 언제 아버지께서 폐병을 앓으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폐병 때문에 병역을 면제 받은 아버지께서는 성주의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시려고 했으나, 할아버지의 성화 때문에 부산으로 살 길을 찾아 나섰다. 당시 큰아버지께서는 하사관으로 군대를 전역하고 농협에 취직해서 승승장구하고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부산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구기 종목과 관련한 날렵함이나 잔머리는 없으신 편이나, 기본적으로 어휘 능력과 계산 능력이 뛰어나고 교양도 풍부하신 편이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대구상업고등학교 졸업 이후 직장에 다니시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셨다. 아버지의 키는 176센티미터로,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제법 큰 키였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산골에서 뛰놀며 농사일을 거드셨던 아버지의 체격은 매우 건장했다. 체력과 열정과 끈기로 아버지께서는 부산에서 상인으로 나름의 성공을 거두셨다. 비록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기는 하셨지만, 그 도움은 정말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수성가하셨다고 할 만 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들이닥친 1997년이 되기 전까지 많은 돈을 버셨다. 나는 우리 가정이 부유해졌던 과정을 잘 기억하고 있다. 부모님께서는 금정구 구서동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사시다가 명륜동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오셨다. 내게는 주택에서 살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낡은 1층 주택에는 작은 마당이 딸려 있었고, 화장실은 재래식으로 집 본채와 떨어져 있었으며, 연탄으로 난방을 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늘 온천장에 있는 한 돼지갈비 집에서 외식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우리 가족은 원래 있던 집터에 새로 3층짜리 집을 지었다. 집을 짓는 동안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벽돌집에서 세를 얻어 살았다.

 

   우리 집이 생기면서 내게는 나만의 방이 생겼다. 그와 더불어 내게 일종의 자유가 생겼다. 나는 내 방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 집의 지하실은 아버지께서 업무를 보시는 사무실이었고, 직원들도 대여섯 정도 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바쁘셨고, 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는 어머니께서 계신 경우가 드물어서, 나는 놀이터에서 놀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건담 장난감이나 총을 갖고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가면서 상상하고 놀았던 것, 그것이 아마도 내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하고 짐작해본다.

 

   어머니께서는 1956년에 경상남도 합천에서 13녀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셨지만 그다지 부유하신 편이 아니었다. 큰이모께서는 초등학교만 졸업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중학교까지 합천에서 졸업하신 후, 외삼촌과 함께 지내시면서 서울에서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니셨다. 어머니께서 언제, 어떤 계기로 부산에 내려오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산의 한 공장에서 일하시던 어머니는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신 후 결혼하셨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인내심이 강하시고 자존심도 세신 편이다. 아버지와 달리 바둑이나 장기 같은 잡기에 능하시진 않지만, 음식을 맛있게 잘하시고 전업주부를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셔서 매일 매일을 충실하게 사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리는 것은 삶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법을 익혔다. 나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다른 친구들을 이기고 1등을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만약 영특함으로 따진다면 나는 나의 아버지보다 못하다. 그러나 나는 끈덕지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꾸준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에는 남들보다 뒤지지 않았다. 부모님께서는 학창시절 시골에서 농사일을 도우셨지만, 나는 학창시절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이 내가 공부를 잘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건강한 신체와 평균 이상의 지능을 물려받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렇게 무사히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부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고, 부산과학고등학교 중퇴 이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것이 그다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험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 다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국립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자부심은 갖고 있다. 나는 지금도 신체 능력이나 정신적 능력이나 평균 이상의 건강함만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외환위기의 결과는 1998년에 나타났고, 아버지께서 주로 거래하시던 회사가 부도가 났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 규모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그 전까지 모아둔 돈으로도 누나와 내가 대학을 다니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나는 국립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등록금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사병이 아니라 장교로 군복무를 하기로 결심했다. 사병으로 복무하면 복무 기간은 짧지만 돈을 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교로 복무하며 돈을 모아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했고, 그런 나의 계획은 실현되었다. 나는 강원도 홍천에서 육군 학사장교로 30개월 근무했다.

 

   전역 후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나는 부모님에게 학비를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돈을 벌었다. 박사과정 입학 후, 가까운 친척 때문에 집 형편이 더 어려워졌고 교육대학을 졸업한 누나는 초등교사 임용시험에서 떨어졌다. 여러 모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의 미래는 암울했고, 대학원에서의 공부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일종의 승부수를 던졌다. 박사과정을 휴학하고, 그때까지 모아두었던 돈만으로 취직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7급 공무원시험과 공공기관 입사 준비를 병행했고, 취직 준비 후 6개월 만에 한국장학재단이라는 준정부기관에 공채 직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이후에는 여러 일들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누나는 임용시험에 합격했고 매형을 만나 결혼해 예쁜 남자 아이를 낳았다. 비록 우리 가정의 부유함은 예전에 비해서 많이 줄어들었지만, 나와 누나가 매달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은퇴하신 후 부모님께서도 큰 걱정 없이 생활하고 계신다. 나도 올해 531일에 4년 동안의 연애 끝에 은혜와 결혼을 했다. 나는 이제 서른 세 살이고, 아내인 은혜는 서른 한 살이다. 비록 머리가 많이 빠지긴 했지만, 나는 아직 건강하다.

 

   나의 본적은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마수리다. 비록 아버지만은 못하겠지만 성주 시골은 내게도 친숙하고 정겹다. 은혜는 대구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도 내년 11월 초가 되면 대구로 이전할 계획이다. 큰아버지, 둘째 고모, 셋째 고모 모두 대구에 집을 갖고 계신다. 경북 성주 출신 강씨 집안 남자인 나는, 부산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강원도에서 군복무를 한 다음 대구로 내려갈 예정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잘 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대구에서 살게 되면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다. 아들의 집과 고향인 성주가 가깝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 때는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께 차례를 드렸다. 차례를 드리며 나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계를 따르는 한 명의 자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강씨 집안의 남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며 가족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 아니겠는가. 건강하게 자라서 사회에서 제 몫을 하며 부모님을 봉양하고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기르는 일, 이것이 가장 기본이 되는 일 아닌가. 굳이 최고가 되지 않아도, 굳이 부자가 되지 않아도 성실하고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 집은 대한민국의 중산층에 속한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으로 중산층 중에서 상위에 속해 있다가 점점 중하위로 떨어질 때쯤 누나와 내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다. 나는 상위층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늘 하위층에 속하는 우리나라 동포들에 대한 일종의 부채감을 느낀다. 물론 나는 내가 정의의 투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검소하고 소박하게 생활하긴 하지만, 나는 사회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한 적이 없다. 나는 존경할만한 공무원, 법조인, 정치인이 등장해서 우리나라를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야만 나와 나의 아이들이 이 땅에서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거듭해서 내가 누구이고,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물어왔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이렇게 상투적인 글을 쓰게 되었지만, 이 글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나는 가족에 대한 생각 없이도 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는지를 스스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이 나의 지인들이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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