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자’가 나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이라면, ‘국립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라는 신분은 나의 사회적이고 공식적인 직책이다. 교수는 대학에서 학생들과 ‘상호작용’한다(‘가르친다’라는 일방향적 표현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와 같은 상호작용은 주로 학기 중에 이루어지며, 학기는 봄/여름/가을/겨울학기로 나뉘는데, 대개 여름학기와 겨울학기는 잘 운영되지 않는다. 학기와 학기 사이의 기간을 ‘방학(放學)’이라고 한다. 교수 관점에서 이때는 의무적으로 대학생들과 상호작용할 필요가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기간이다.
연구자의 관점에서 보면 방학이야말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기간이다. 학기 중에는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을 위해 많은 일들(수업 준비, 과제 및 시험 채점 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학기 중에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못하므로, 방학 때 비로소 교수는 연구자로서 자신의 전공 분야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방학 때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서 학술논문을 집필할 수 있는 자원을 마련하고자 한다. 나는 대개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작업을 한다. 철학 관련 학술대회 발표 신청을 한 후, 발표 신청을 계기로 삼아 학술논문 원고를 집필한다. 그렇게 집필한 원고를 토대로 발표 자료(대부분 PPT)를 만들어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학술대회에서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원고를 보완한 후 학술지에 투고한다.
내 과학철학 연구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 번역이다. 나는 현재 내가 연구하고 있는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의 유고작 [시간의 방향(The Direction of Time)]을 번역하고 있다. 이 책을 구성하는 30개의 절 중 8-10개 정도의 절을 이번 여름방학 때 번역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미 15개 정도의 절을 번역해 둔 상황이므로, 여름방학이 지나면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을 번역하는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올해 말까지 거의 확실하게 이 책의 초벌 번역을 끝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좀 더 일찍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종의 블루오션(Blue Ocean)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억지로 블루오션을 찾은 것은 아니며, 그냥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또한 나는 방학 때도 우리 목포대학교 ‘글쓰기 클리닉’ 튜터로서 계속 활동한다. 글쓰기 클리닉 튜터는 일종의 스파링 상대와도 같다. 운동을 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나와 같이 뛰면서 가볍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스파링 상대다. 나는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혼자서 계속 글을 붙잡고 있으면 진행이 잘 안되고 자기의 생각에 갇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 나는 글쓴이의 글을 읽고 가볍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그러면 글쓴이는 그런 피드백에 자극받아 자신의 글을 더 보완하고 가다듬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무 가혹하게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혹하게 비판하면 글쓴이가 글을 수정할 의욕조차 잃게 된다. 나는 대부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호의적으로 읽기 때문에, 가혹하게 비판할 필요성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물론 신랄한 비평으로 이름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와는 맞지 않다.
가족들과 집안일을 돌보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학기 중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기 때문에 방학 때는 특히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한다. 운동도 중요하다. 타지 생활을 하다가 보면 먹는 것이 불규칙하고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게 되므로, 최소한 방학 때라도 적어도 하루에 30분 정도 가볍게 달리려 한다. 과도하게 운동하는 것은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 또한 방학을 활용하여 내 몸 곳곳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는데, 특히 오래전 생겨 계속 남아 있는 오른쪽 발목 위 작은 물혹(결절종)을 처리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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