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인공적 세계에서 자연적 세계로

강형구 2026. 1. 25. 07:51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모든 과목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과(全科)’라는 책이 있었다. 반에 속한 학생들은 그 책을 사서 공부할 수 있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으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개인 과외는 거의 꿈을 꾸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후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했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든 쉽게 백과사전적 지식에 접할 수 있으며, 인터넷 강의를 통해 온갖 종류의 교육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고,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대부분의 언어적 작업을 인간 대신 처리해 주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은 변했고, 그 변화의 중심에 내가 있지는 않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게 아니라 그 변화를 따라가면서 자기의 살길을 찾는다. 실질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수는 적다. 그런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무던하게 잘 살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 특히 부산에서 자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접한 높은 수준의 문화는 불교문화였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교회가 아니라 사찰을 자주 찾으셨고, 그 영향을 받았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집 근처에 있는 산(금정산, 대포산)에 있는 절들을 즐겨 방문했다.

 

   초등학교 시절, 286 컴퓨터가 얼마나 비쌌던가? 10장이 넘는 플로피 디스크에 분할해 담겨 있던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던가? 지금은 어떤가? 크기가 훨씬 작은 노트북 컴퓨터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을 간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나? 오늘날 플로피 디스크가 웬 말인가? 이렇듯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시절을 함께 살아낸 우리 부모님과 나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1990년대 말에 우리 가족 앞에도 IMF 외환위기가 닥쳤고, 대부분의 가족이 그랬듯 우리 가족 역시 큰 타격을 입으며 그 위기를 가까스로 이겨냈다. 아버지는 아버지, 어머니는 어머니, 바뀌지 않고 견고하게 나의 운명으로 남는다. 비슷하게, 나는 나다. 세상이 변해도 나는 나로 남는다. 나로 남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사회의 부조리함에 분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왕조 체제에 순응하며 어떻게든 계속 살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평범한 사회 구성원에게 그 사회를 운영하는 공식 체제는 수용해야만 하는 반강제적인 존재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어떤가? 그걸 내가 선택했나? 아니다. 태어나 보니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던 거다. 물론 내가 이 세상의 움직임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된 이후 나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리(투표권)를 성실히 행사했고,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나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행위는 내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 사회적 영향도 미미했다.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족이 중요하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가족은 있었으니까. 인터넷이 있든 없든 가족은 계속 있을 것이니까.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는 일. 상대가 이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동성일 수도 있다. 성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입양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인간으로서 함께 살며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나와 다른 인간.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유대관계. 그래서 나는 점점 다시 가족으로 돌아간다. 나의 부모님, 나의 아내, 나의 아이들. 이들은 나의 가장 직접적인 운명이고 나에게 가장 자연적인 존재들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내 부모님을 친근하게 여긴다. 자주 찾아뵙기도 하고, 자주 찾아오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서 내가, 나와 아내에게서 아이들이, 아이들이 다시 제 짝을 만나 이들에게서 또 다른 아이들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고리보다 더 인간적이고 견고한 세계가 어디 있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의외로 단순하며 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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