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관용적 태도

강형구 2025. 6. 12. 09:19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어.” 이것은 내가 한국장학재단에서 모셨던 모 실장님께서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었다. 이와 관련되어 그 실장님께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 역시 늘 마음에 새기고 다니셨다. 나는 실원으로서 실장님의 그 태도로부터 큰 인상을 받아 이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한국장학재단에서 모셨던 다른 부장님께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사자성어를 책상에 붙여 놓고 생활하셨다. 서로 화합하되 서로 같아지지는 말라는 뜻이다. 두 부서장께서는 중간에 사고 없이 직장 경력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셨다고 알고 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직장 선배들이었다.

 

   내가 생각할 때 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길을 잘 걷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고, 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해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면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이 생각은 정답이 아니며 정답이 될 수도 없다. 사람마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점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길을 잘 걷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꼭 필요하다. 우선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수용하면 고통이 덜어지고 끝내 망각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나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도 꼭 필요하다. 내가 나의 모습, 나의 성향, 나의 지향을 잘 이해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에게조차 자신이 일종의 증오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삶은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잘 이해하고 수용하면 무엇보다도 삶의 고통이 줄어든다는 이점이 있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아야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철학, 특히 과학철학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학철학에 큰 재능이 없는 나 자신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자책하거나, 나보다 훨씬 더 능력이 출중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한다면, 이는 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고 정작 내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선 평범한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아닌 출중한 다른 과학철학 연구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이 자신들의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축복하면, 내 마음의 고통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내가 계속 과학철학을 즐겁게 연구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내가 최근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이번 주 토요일과 다음 주 목요일 학술대회 발표를 앞두고 내가 너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는 매일 열심히 성실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사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나로서는 할 일을 다 한 거 아닌가. 나의 재능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 물론 그 결과가 다소 부족할 수 있겠지만, 그건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몫이다.

 

   저명한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자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1891-1970) 역시 “관용의 원리(Principle of Tolerance)”를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카르납의 원리가 갖는 맥락이 이 글의 맥락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타인과 나 자신에 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은 때때로 되새길 필요가 있는 좋은 교훈이라고 본다.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어. 잘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이해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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