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어렵게 어렵게, 겨우 겨우

강형구 2020. 8. 7. 00:29

   중학교 1학년 때 이문열씨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나의 독후감은 이 소설의 핵심을 전혀 제대로 짚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정에 넘쳐서 독후감을 썼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문열씨의 소설에서 제법 감동을 받았던 나는 이문열씨의 소설들을 찾아서 한 권 한 권씩 읽어 나갔다. 그렇게 그의 소설들을 제법 읽고 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예전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엉뚱하게 독후감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것을 잘못 이해하고 그것에 엉뚱하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파고들어 시간이 제법 지난 후에야 겨우 겨우 그것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 이는 나와 같은 둔재가 보여주는 보편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수월하게 해낸 적이 별로 없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던 적도 거의 없다. 그냥 스스로 끈질기게 동기부여를 하면서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도서관은 가장 훌륭한 안식처였다. 도서관에서는 자유롭게 읽고, 생각하고, 쓸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독서는 무엇인가를 위해 경쟁하는 독서가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나는 책과 함께 쓸데없고 달콤한 몽상에 빠질 수 있었다.

 

   내게는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다른 졸업생들이 “최우등”이라는 수식을 받으며 졸업할 때 나는 겨우 겨우 기준 학점을 넘겨 졸업장을 받았다. 취직 준비를 할 때도 얼마나 많이 서류와 면접 전형에서 탈락했는지 모른다. 취직한 이후에도 직장 생활이 쉽지 않아 무진장 고생을 했다. 정말로 나는 이 모든 일들을 지금껏 겨우 겨우 해 왔다. 그래도 오기 하나는 있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면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실패하면 다시 시도했다. 또 실패하면 또 다시 시도했다. 그냥 될 때까지 했다.

 

   겨우 겨우 박사과정을 수료한 나는, 이제 겨우 겨우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학술대회가 있을 경우 가능하면 발표하려고 하고, 발표문을 쓰는 것을 계기로 삼아서 논문도 조금씩 쓰려고 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어렵다.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후 질문에 대해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어물어물 하고,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면 논문의 수준이 떨어진다며 게재불가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난관은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었던가. 내가 지금까지 뭐 하나 수월하게 이루어낸 적이 있었나. 여러 번 거부당하고 퇴짜 맞아가면서 겨우 겨우 뜻하는 바를 이루어내지 않았던가. 박사학위 논문 작성이 나 같은 둔재에게 너무나 험난한 길일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도 나는 박사학위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쉴프(Schillp) 박사가 편집한 ‘살아 있는 철학자 총서’ 중 한 권인 [Albert Einstein : Philosopher-Scientist]를 번역하고 싶다. 그런데 연구재단에 번역 지원 신청을 하려면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 또한 나는 아돌프 그륀바움(Adlof Gruenbaum)이 쓴 [Philosophical Problems of Space and Time]을 번역하고 싶다. 이런 책을 출판해 줄 출판사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 책의 번역 또한 연구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 지원을 받으려면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위가 필요하다.

 

   매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함께 새로 태어난 쌍둥이와 큰 딸을 돌본다. 시간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고 논문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일들을 어렵게 어렵게, 겨우 겨우 조금씩 하고 있다. 나는 남들보다 더 빨리 목표점에 도달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 그곳에 도달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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