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대구에서 열린 철학 학술 발표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교수님께서도 과학철학에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신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연락을 주셔서, 고려대 철학과에서 2025년 1학기에 철학과-물리학과가 서로 협업하여 수업을 개설할 계획인데, 그때 혹시 공간과 시간에 관한 특강을 각각 1회씩 해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하셨다. 당연히 나로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 제안에 응했다.
막대와 시계의 물리학.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 유형의 기원을 찾던 중 나는 리만과 헬름홀츠의 논문 원전을 읽게 되었고 이로부터 큰 놀라움을 느꼈다. 헤르만 바일이 1918년 무렵 리만의 1854년 교수자격 강연 원고에 다시 주석과 서문을 달아 출판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또한 흥미롭게도 물리학자 파울 헤르츠와 철학자 모리츠 슐리크는 1921년에 헬름홀츠의 인식론적 저작들을 편집하여 출간했다. 당연히 이 책에는 헬름홀츠의 1868년 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리만과 헬름홀츠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고려대 특강에서는 기하학의 기초에 관한 리만과 헬름홀츠의 관점을 비교해 논하기로 했다.
당연히 이번 특강도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만큼만 준비했다. 큰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특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틈틈이 고려대 철학과에 관해 찾아보았다. 나를 초청해 주신 교수님의 특강 몇 개를 온라인에서 찾아보았고 교수님의 관점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대 철학과의 다른 교수님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다들 훌륭한 철학자들이었다. 이번 특강을 계기로 삼아 고려대학교에 재직 중이신 멋진 철학자들을 알게 되었고 조금이나마 배우려 했다. 고려대 철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학과를 소개하는 영상도 몇 개 있었다. 흥미로웠고, 요즘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올해 6월 중순에 대구의 모 대학에서 철학 학술 발표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발표 주제는 자유이며 현재 발표자를 모집하고 있어, 참여 신청할지 고민하고 있다. 학술 발표회 참여로 배워가는 게 많다. 특히 내 전공 분야가 아닌 다른 철학 분야에 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가급적 참여 신청해서 나 자신의 철학 연구도 진행하고 다른 철학자들과도 교류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당연히 발표 준비 과정에서는 다소 고통스럽기도 하다. 어떻게든 나 스스로 생각을 다듬어서 글을 쓰고 발표 자료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짧은 고통의 시간을 잘 견디면 그에 맞는 수확이 따라온다.
나는 나 스스로 훌륭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내가 미력하나마 우리나라의 철학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하는데 일말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나의 연구 주제에 관해 연구해서 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나름 아주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수업 준비도 열심히 하고, 연구 및 논문 집필도 열심히 하며, 아직은 어린 내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시간이 무척 빠르게 지나간다. 아마도 나의 40대는 이렇게 지나갈 것이다.
고려대의 경우 4월에는 공간을 주제로, 5월에는 시간을 주제로 특강을 하기로 했다. 최근 나는 인과성과 시간 개념이 거시 통계적인 까닭에 일종의 ‘창발적 실재’라는 관점을 갖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인과성과 시간만큼 인간의 경험을 통해 강력하게 그 의미를 부여받는 과학적 개념이 실질적으로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과성과 시간이 창발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근본적’이라고 말하려면, 그보다 더 기초적인 개체 혹은 과정으로 상정되는 것들의 실재성을 부정하거나 유보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합당한지 따지는 데 관심이 있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5월 특강 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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