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139

왜 철학은 계속 철학이 무엇인지를 물을까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은 과학의 특징을 ‘정상과학’이라 했다. ‘정상과학’이 되면 표준적인 모형, 문제 풀이 방식이 안정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철학적인 논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과학의 이와 같은 ‘안정적인’ 측면은 과학 하는 인간 정신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마치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자아와 초자아가 정신 구조 전체에서 아주 작은 일부를 차지할 뿐인 것처럼 말이다. 표면적으로는 억제되어 있지만 무의식에서는 늘 철학적 경이로움과 질문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미 쿤은 과학의 ‘진화로서의 진보’를 말할 때 철학의 강인한 생명력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패러다임의 가장 강력한 적은 패러다임 자신’이라는 쿤의 주장도 아주 깊은 통찰을 주긴 한다. ..

통계물리학과 확률(1/3)

고대 그리스인 중 물, 불, 공기, 흙, 에테르 등과 같은 5가지 종류의 물질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생각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분류가 매우 거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암석들이 있고 이들을 잘게 쪼개면 작은 알갱이들이 남는다. 작은 알갱이들은 물에 녹일 수 있으므로 액체가 될 수 있으며, 가연성 물질은 태우면 연기가 되어 대기 속으로 동화된다. 천상의 물체인 에테르는 몰라도,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 원소 사이에는 변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들은 실제로 원소라고 말할 수 없다. 이들보다 더 다양하고 기초적인 원소가 존재해, 이들이 결합하여 물, 불, 공기, 흙을 만들 것이다. 기체, 액체, 고체는 원소가 아니라 물질의 상태..

상대성이론과 시공간(3/3)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우선 아인슈타인 자신의 관점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년)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다양한 전자기적 현상을 체계화한 전자기학이 발전하면서 질점이 아닌 ‘장(field)’이 물리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전자기적 현상을 기술하는 물리 법칙인 맥스웰 방정식이 상대적으로 등속 운동하는 두 기준계에서 다른 꼴로 표현된다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거듭 확인되었고, 아인슈타인의 1905년 특수 상대론은 ‘갈릴레이 변환’이 아닌 ‘로렌츠 변환’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바로 잡은 이론이었다. 비록 이후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1915년의 일반 상대론은 이와 같은 상대성 원리를 등속 운동이 아닌 가속 운..

상대성이론과 시공간(2/3)

라이헨바흐는 최종적으로는 에를랑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사실 그는 처음에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공학을 공부했었고, 대학 입학 직전까지도 그의 장래 희망은 ‘기술자’였다. 교수자격 취득논문 제출 이후 그가 1920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은 슈투트가르트 공대였다. 그곳에서 그는 공학, 수학, 물리학, 철학과 같은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면서, 학술적으로는 상대성이론 속 시간과 공간에 초점을 맞춰 이에 대한 상세한 ‘철학적 분석’을 진행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분석 작업이 1928년까지 이어졌고, 그 결실이 『시간과 공간의 철학(Philosophie der Raum-Zeit Lehre)』으로 맺어졌다.    1920년에서 1924년 사이에 라이헨바흐는 ‘상대론의 철학자’로 부..

상대성이론과 시공간(1/3)

라이헨바흐는 1915년에 에를랑겐 대학에서 수학 교수와 철학 교수의 공동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는 “물리적 실재를 수학적으로 표상하는 데 있어 확률 개념이 하는 역할”이었다. 라이헨바흐는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칸트가 말했던 ‘선험적 종합 원리’(예를 들면, 시간, 공간, 인과성의 원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지식의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칸트 철학의 형식을 빌려 제시한 것이다. 박사 학위 취득 직후 그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에 참전했다. 그는 통신부대에서 일했는데, 아마 뛰어난 공학적 계산 및 추론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병에 걸려 도중에 전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통..

경험주의 과학철학(3/3)

특정 시대의 과학기술이 보인 성공을 조직의 권력 체계와 분리하여 탐구한 것은 그리스인의 큰 공헌이었고,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러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것 또한 그리스만의 중요한 공헌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은 실용적 수리과학의 연역적 재구성이 성공했다는 실제 현상에 신화적이라 할 수 있는 환상적인 해석을 부여했다.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수학은 실제 세계의 다양한 측면들에 잘 적용이 되는데, 실제 세계에서는 수학적 개념(원, 삼각형, 사각형 등)들과 완벽하게 합치하는 대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수학적 개념의 세계가 실제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해석이었다. 이러한 해석의 위안과 매력은 너무도 강력하여, 소크라테스는 육체가 죽어도 정신이 불멸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

경험주의 과학철학(2/3)

모든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은 일종의 ‘해석 대상’이다. 20세기의 경험주의자 라이헨바흐는 ‘사변철학’ 대 ‘경험주의 철학’이라는 대립 구도를 설정하여 그리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전개하지만, 나는 상황을 그와는 약간 다르게 바라본다. 인간이 언어를 만든 후 인간 공동체가 언어가 만들어 내는 서사적 세계 속에서 살게 되면서, 그러한 서사적 세계가 인간 조직을 통치하는 정치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신화적 세계관’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과학기술 문명의 의미마저 이 신화적 세계관 속 일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변방에 있던 그리스인들은 과학기술 문명이 갖는 의미에 대해 동방과는 ‘다르고’ ‘독특하게’ 해석했고, 바로 그 점에서 역사 속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의 공헌은 두..

경험주의 과학철학(1/3)

생명체인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다양한 현상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살아왔다. 주로 인간의 생존과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체계화된 지식을 축적해 왔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의 축적, 개선, 전파를 위해 언어의 발명 및 정교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세계의 여러 현상을 본뜨고 세계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단순한 형태의 서사(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 개인 혹은 인간 공동체에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해석’과 ‘의미’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집단을 이루어야 했고 개체들 사이에서의 ..

한스 라이헨바흐와 20세기 경험주의 과학철학(2/2)

고대 그리스에서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대표한다면, 근대 이후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는 영국의 흄과 독일의 칸트이다. 흄과 칸트가 등장한 맥락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등장했던 맥락과는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은 뉴턴 역학의 눈부신 성공이라는 배경 속에서 등장했으며, 뉴턴 역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흄은 뉴턴 역학의 ‘방법론’을 인식론에 도입하고자 했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데카르트의 이론과 대조하며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했다. 뉴턴에 따르면, 그는 케플러의 3가지 행성 법칙을 일종의 ‘현상적 법칙’으로 수용한 후, 귀납의 절차를 통해 이러한 현상적 법칙들을 더 높은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일반 법칙을 추론했다. 이때 그는 현상적 법칙을 일종의 ..

한스 라이헨바흐와 20세기 경험주의 과학철학(1/2)

과학철학은 현재 시점에서 인간 공동체가 수립한 과학지식 체계가 갖는 여러 측면들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학문이다. 인간 공동체가 강력한 과학지식 체계를 수립하여 자연의 여러 현상들을 예측하고, 설명하고, 조작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과학지식 체계의 ‘의미’ 혹은 ‘가치’이다. ‘의미’와 ‘가치’는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제시될 수 있으며, 우리가 과학지식의 어떤 ‘의미’ 혹은 ‘가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지에 따라 과학지식에 관련된 우리의 실천 양식 또한 변한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는 뛰어는 기술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 두 문명은 정교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고, 계절과 천체 현상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동방에 비할 때 고대 그리스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