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현상론적 태도

강형구 2022. 10. 20. 09:36

   해석과 의미 부여 활동에 지칠 때면 나는 나의 태도를 현상론적인 것으로 바꾼다. 나를 일종의 기계로 간주하여, 나의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다채로운 현상들에 집중하고 의식적으로 이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상론적인 태도를 취하면 나 자신의 존재가 좀 더 경이롭게 느껴진다. 목 위에 두뇌를 달고 있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상들을 파악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무시하고, 계속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론적인 태도를 취하면 나는 나라는 경이롭고 기괴한 하나의 자연을 만난다. 사람이 파충류의 감정 없는 눈과 복잡한 문양의 피부 표면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듯, 내가 나 속에서 만나는 자연은 내가 생각하던 나와는 이질적이며 내게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론적 태도를 취하는 목적은 혼돈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현실을 새로운 관점과 느낌으로 다시 바라보고 대하기 위해서이다. 현상론적인 태도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내가 갖고 있던 세계에 대한 의미와 해석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의미와 해석이 나에게 주었던 슬픔, 고통, 기쁨, 즐거움은 당연히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이 과거에 이미 일어났던 일들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준다. 그런데 너무 성찰적인 것은 일종의 퇴폐성을 낳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의미와 해석의 세계로 돌아와 온갖 종류의 감정적인 소용돌이에 직면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맞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해석이 중요하다. 이미 과거는 지나가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을 매개로 계속 미래가 내 앞에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어떤 해석으로 세상과 접촉하여 관계를 맺을 것인가. 내가 나를 살아 있게 하고 내 삶을 위해 작동시키는 해석은 무엇인가. 그 해석은 얼마나 나 자신으로부터 숨겨져서 나를 통제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그 숨겨져 있는 해석을 발견하고 추적하며 전투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과 유희하고 있는가. 이제 나는 다시금 나의 현실로, 나의 필드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는 잘 짜여진 듯한 세계의 각본 곳곳에 예상하지 못했던 빈틈들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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