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무술의 전통처럼

강형구 2013. 9. 1. 22:04

 

   홍천에서 육군장교로 복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홍천군청 근처에서 근무했고, 장교 숙소는 부대 밖에 위치해 있었다. 주말에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홍천읍에 있는 홍천도서관에서 과학과 철학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 시절의 나는 전역한 다음 다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순수한 마음이었다.

 

   전역을 하고 대학원으로 돌아갔다. 학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끊임없이 과외를 했다. 하지만 나는 좌절했다. 집안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고, 나 스스로의 학문적 재능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취업을 생각하지 않았던 나에게 취업 준비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것과도 같았다. 행정학, 행정법, 헌법, 경제학, 경영학 책들을 꾸역꾸역 읽었고,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들을 하나씩 취득했다. 취업을 준비한답시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는 않았다. 그동안 모아둔 돈만으로 취업을 준비했다. 인문대학 철학과 출신에 학부 학점도 좋지 않고 석사 학위까지 있는 고학번인 내게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나는 세상과 전쟁을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교육부에 속한 공공기관에 정규직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직장인인 내게 이제 철학이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내가 그토록 연구하기를 열망했던 과학철학은 이제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질까? 대학원을 떠나온 지 오래된 지금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잃어버린 내게,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가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연 직장 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제대로 병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나의 심장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최고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비록 교수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계속 과학철학을 공부해서 이 전통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라고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과학철학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것이 분명히 매우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공부를 끝마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과정을 수료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학위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뿐이다. 다소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생존을 위해 악착같이 공부해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에 핵심적인 기여를 할 가능성은 매우 적을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이 학문의 전통에 속해서 이 학문이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태권도의 달인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태권도장에서 태권도를 수련하듯, 나 역시 전문가가 아니지만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서 이 학문을 연마하고 수련하고자 한다. 그렇게 나도 이 학문의 전통을 잇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이 묵직한 도전이 너무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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