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감사한 일들

강형구 2025. 5. 28. 22:31

   소소한 삶의 기쁨들이 있다. 되돌아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풍족하게 살았던 적이 별로 없다. 수수한 옷을 입었고 수수한 신발을 신고 다녔다. 나는 초중고 시절 과외 수업을 받은 적이 없고 고액을 들여 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 대학 시절에는 국립대학교의 인문대학 학생이라 등록금이 전혀 비싸지 않았다. 대학 시절 나는 매달 30만 원을 생활비 삼아 살았고, 학교에서는 대개 제일 값싼 밥을 사 먹었다. 군대에서 장교 생활할 때도 나는 주말이나 휴일에 장교 숙소 근처의 군립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하루 종일을 보냈다.

 

   나는 서울에서 살 생각을 못했다. 내 첫 번째 직장은 취직 당시 서울에 있었으나 곧 대구로 이전할 공공기관이었다. 직장이 대구로 이전한 뒤에 아내와 나는 대구 도심이 아닌 변두리에 있는 신도시 지역에 전셋집을 하나 마련했다. 이후 은행 대출을 해서 우리 다섯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집을 마련했는데, 내년이나 내후년이면 대출금을 다 갚을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물론 수도권의 집값을 생각하면 퍽 소박한 금액의 아파트이지만, 조만간 아파트 대출을 다 갚아 온전하게 우리 가족의 집이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아주 운이 좋아 국립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대학 교수의 좋은 점은 하루 종일 연구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중간중간에 강의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강의를 매우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사람들 앞에서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나보다 수준이 낮으므로 교수는 쉽게 설명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에 대해 정말 깊고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주제에 관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그 사람이 그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 책을 읽고 번역하고 논문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 내가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인정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감사하다. 가끔은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내 능력에 비해서 과도하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내가 대학교수로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춘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 때마다 나는 내가 지금껏 정정당당하게 나의 모든 이력을 가꿔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애쓴다. 나는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부정도 저지르지 않고 공정하게 경쟁을 치러 여기 이 자리까지 왔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지금껏 이룬 성취가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나로서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힘겹게 얻어 온 성취들이라 너무나 소중할 뿐이다.

 

   나는 삶이라는 것이 냉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은 거저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직장에서도 일을 해야만 그 구성원에게 사회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자본을 월급 형태로 지급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급여도 없다. 당연히 교수도 마찬가지다. 연구하지 않고, 교육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교수는 없다. 교수는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함으로써 급여를 받는 한 명의 직장인이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나는 직장인으로서 마음을 다잡는다.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오늘도 열심히 일해야겠다.

 

   저녁때 퇴근하는 버스를 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도 내 할 일을 다 했구나. 오늘도 부족한 부분이 어김없이 있었지만 그래도 수고했다. 오늘보다는 내일 조금 더 나아지겠지. 열심히 살다 보면 튼튼한 실력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겨우 하루하루를 사는 것을 넘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꾹 참고 기다리고 준비하면 더 좋은 논문과 책을 쓰고 더 멋진 번역서를 출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잠들기 전까지 지금껏 내게 허락된 그 모든 우연에 감사하며 포근한 휴식을 즐긴다.